#2. 나는 하늘의 별이었다

Angkor golf course, Siem Reap, Cambodia

by 달을보라니까


앙코르 와트(Angkor Wat, អង្គរវត្ត)에서 돌아와 당신에게 두 번째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을 내기도 했었지만 당신은 매일의 생활에 바빠 내 편지를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한 때 동남아의 맹주였던 크메르 제국이 남긴 앙코르 유적은 우리가 기억하는 크메르 루즈의 잔혹했던 캄보디아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방대하고 위압적입니다. 그 중에서 나는 바이욘 사원(Bayon, ប្រាសាទបាយ័ន)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돌로 만든 얼굴 네 개가 동서남북을 바라보도록 서로 맞붙어 있는 석상들이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다 듣고 듣는듯한 표정으로 바이욘의 높고 가파른 제단 위에 수두룩하게 많이 서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반짝이며 빛났던 그 시대에 저 밑에서 이 석상들을 올려다보았을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봅니다. 그리고 바이욘 석상들과 같이 서있었을 왕과 권력자들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 또 어떻게 보였을까 싶습니다. 이 거대한 석상들과 조각들은 공포와 경이 그 자체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징체계가 뿜어내는 권위와 권력은 높은 제단 위에 서 석상들과 함께 서있는 왕의 전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힘으로 왕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거대하고도 방대한 조형물들을 구석구석 빈틈없이 다듬고 조각하도록 하고, 또한 당시 사람들 삶의 모든 것을 움켜쥘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만일 당시에 살았었다면, 그리고 내가 왕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세상 무엇보다 존귀하고 모든 것 위에서 군림하는 절대자로서의 나에 대한 즐거운 상상은 금세 끝납니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한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은 제단 아래에서 고개도 못 들고 벌벌 떨고 있었을 존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시간으로 우리 뇌를 스캔할 수 있는 세상이 곧 시작될 수 있을 거라는 요즘의 두려움과 유사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제단은 사라졌고, 위와 아래의 구분도 희미해진 오늘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는 조작된 상징과 이데올로기의 위쪽에 서 있고 누군가는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체제를 지탱하는 힘은 나도 언젠가는 혹은 어쩌면이라는 낮은 확률에 기댄 욕망입니다. 그런 의미로 권력관계에서의 우리는 모두 공모자인 셈입니다.


앙코르와트란 그저 돌무더기일 뿐이라고 했던 당신의 말을 나는 오만이라고 생각한 적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와보니 당신 말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이 거대한 유적이 몇 시간을 달려도 창밖 풍경이 변하지 않는 플로리다 오렌지 농장 지역처럼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지나간 과거인 것 같습니다. 6세기 전에 멸망한 이곳이 20세기에 다시 한번 도륙되면서 현재와 관계없는 고립된 덩어리로 존재한다는 느낌입니다. 아무리 허술한 건물이나 기둥에도 어김없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각양각색의 문양들을 제대로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휙휙 지나칩니다. 변변한 도구 없이 이 많은 돌을 하나하나 정성 들여 다듬고 깎았던 수많은 손들에게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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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인데도 앙코르 골프 코스로 향하는 큰길을 면한 야트막한 건물들에는 벌써 손님을 기다리는 불빛들이 환합니다. 크고 작은 버스와 탈것들 주변으로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늘의 목적지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이 다양한 국적별로 드문드문 모여 있습니다. 서로를 묶어줄 다른 끈이 없으면 자신과 닮은 무리에 섞여 드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용광로에서도 녹지 않는 인종과 문화는 샐러드처럼 흔들수록 같은 것끼리 모이기 때문입니다.


골프장 입구에 들어서자 이곳이 유러피안 리그의 아시아 예선이 열리는 곳이라는 팻말과 각종 대회를 알리는 표지판이 여기저기에서 보입니다. 한 눈에도 잔디 상태와 곳곳의 정리 상태가 좋아 보입니다. 클럽하우스에 도착하자 입구에 줄지어 앉아 있던 캐디 중 한 명이 그야말로 쪼르륵 달려 나와서 내 골프백에 달린 네임택을 보고는 곧바로 한국말로 몇 마디 인사말을 건넵니다. 대략 스무 살 정도 됐을까. 이 친구가 오늘 나와 네 시간을 같이 보낼 겁니다. 유명 토너먼트가 열리는 곳인 만큼 라운드를 시작하기 전에 사용할 수 있는 연습 시설이 아주 좋습니다. 천연잔디 연습장에 잠시 들었다가 1번 홀 티잉 그라운드로 향합니다.


오늘도 블루티에서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마치 1번 홀은 이렇게 생겨야 한다는듯 388야드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업다운 없이 약간 좌측으로 돌아가는 도그렉입니다. 왼쪽에 해저드가 있지만 그리 위협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멀리서 시엠립을 찾아온 골퍼들을 환영하는 닉 팔도경 (Sir. Nick Faldo)의 환영인사인 듯합니다. 기념품으로 산 로고볼 중 하나를 꺼내 티에 올리고 첫 티샷을 준비하고 있자니 왁자지껄 세 플라이트가 들이닥칩니다. 그들의 기분 좋은 흥분을 이해합니다. 나도 그럴 테니까요. 잠시 멈춰서 기다려보지만 졸지에 시끄러운 갤러리 열댓 명이 생겼습니다. 눈치 빠른 캐디가 손짓하자 주변이 조용해졌지만 그들의 시선이 편하지 않습니다.


어느 홀에선가 앞 팀의 플레이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딴생각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그들이 나더러 먼저 가라고 해서 준비 없이 친 티샷이 순서를 양보해 준 사람들이 박수를 쳐줄 정도로 잘 맞았습니다. 얄궂은 일입니다. 멀리 치려고 마음먹고 온 힘을 다 쓰면 잘 안 되는데 별 평소처럼 하면 좋아지니, 스윙 연습이 아니라 도를 닦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반을 마무리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와서 불필요하게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달라고 하고선 면세점에서 사 온 Siglo VI를 천천히 피웁니다. 골프장의 클럽하우스의 야외 테이블은 천천히 시간을 보내기에 그만입니다. 캐디가 빼꼼히 쳐다보기에 콜라 한 캔을 가져다주고는 좀 기다리라고 했는데 자기가 가지고 온 물만 연신 마시는 모습을 보니 언젠가 태국에서 만났던 나이 든 캐디가 생각납니다. 내가 준 콜라를 가지고 있다가 돈으로 바꾸던 그녀처럼 저 캐디도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현재의 시원함을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땅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의 값싼 노동력으로 다듬고 가꿔졌지만, 그들은 올 수 없는 곳입니다. 하루에 만 원 이만 원을 벌어가고, 누군가가 잃어버린 공을 찾아다 팔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면서 살아가는 삶과 그들의 한 달 월급을 하루에 쓰는 사람들의 삶이 종이의 앞면과 뒷면처럼 붙어 있는 곳이기에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다가 후반을 시작합니다.


참으로 이국적이고 깔끔하게 잘 가꾼 코스입니다. 마치 일본 정원처럼 빈 곳 없이 오밀조밀 꾸몄고 꾸준히 손을 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 친 샷과 못한 샷을 철저하게 가려내는 냉정하고 어려운 코스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앞과 뒤에 아무도 없고 코스에는 하늘과 바람, 구름밖에 없습니다. 전반과 달리 스코어도 잘 나오지만, 그 홀이 그 홀 같습니다. 벙커가 좀 더 많거나 적고, 해저드가 우측 좌측 혹은 앞과 뒤로 바뀔 뿐 마치 앙코르와트처럼 끝없는 되돌이표를 만난 악보 같습니다. 번화가에서 마주치는 비슷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 같습니다. 예쁘지만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골퍼가 디자인했고 유러피안 리그의 아시아 예선이 열리는 좋은 곳인데 나는 왜 여기가 계속 뭔가 아쉽고 불편일까 하는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오늘의 라운드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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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 동안 내 머릿속에 맴돌던 불편함의 정체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그것은 아마도 존재의 망실 즉 죽음에 대한 동물적인 두려움 때문이라 결론짓습니다.


종이에 그려진 막대기 하나는 의미 없는 스칼라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막대들이 모인 곳에 질서가 생기면 그것은 메시지가 되고 의미가 되고 존재가 됩니다. 막대들이 모인 질서가 바코드가 되고 정보가 되는 것처럼, 살아있는 물질로서의 인간은 의미를 만들고 전달하려고 합니다. 이곳보다 훨씬 오래전에 번성했던 이집트 문명은 그들의 메시지를 유럽과 수많은 곳에 전달했고, 전달된 의미는 새로운 질서, 정보와 존재가 되어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실재합니다.


우리는 한때 밤하늘의 별이기도 했고, 찬란한 태양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생명체로써의 질서 속에서 메시지가 되고 정보가 되어 다음 세대로, 또 다음 세대로 전달하며 영생하고자 합니다. 그 질서와 에너지가 우주의 엔트로피 속에서 더는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바스러지는 것을 두려워함은 당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엠립의 질서와 에너지는 과거에만 속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존재가 가장 두려워하는 멸절이 이루어진 것이고 이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후진국에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하는 것이 너무 잔인한 일이라 한참을 망설였지만 생각할수록 내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 냄새에 불편해했었습니다. 아마도 나는 여기에 다시 오지 않을것 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여기에 있는 이 땅의 주인들도 밝은 별이 되는 때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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