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라비아의 로맨스

Emirate golf club, Dubai, UAE

by 달을보라니까


음란한 사회와 근엄한 권력이라는 제목을 적어 놓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슬며서 제목을 아라비아의 로맨스로 바꿨습니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따온 것입니다.


사막에 핀 꽃으로 불리는 두바이입니다. 몇 번의 환승을 빼고는 처음으로 중동에 발을 디뎌봅니다. 소설로 보고 영화로 보던 해 저무는 붉은 사막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에 마음이 설렙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됩니다. 아무리 두바이가 아랍국가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라고 하지만 여전히 율법이 지배하는 나라이고, 게다가 가족과 함께 한 여행이라 누구 하나라도 눈에 안 보이면 신경이 바짝 섭니다.


지금은 노약자와 환자를 제외한 모든 이슬람교도가 해가 하늘에 떠있는 동안 어떤 음식도 먹지 않는 이슬람력 아홉째 달인 라마단 기간입니다. 그래서 라마단 기간의 중동 여행은 별로라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오히려 편리한 점도 꽤 많습니다. 거리의 식당이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외국인과 환자 그리고 노약자를 위한 식당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유명 관광지에서도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손님이 줄어든 가게에서의 협상은 느긋합니다.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엄청나게 더운 날씨라서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흥건해지만 그늘에만 들어가면 서늘하기 때문에 길을 걸을 때면 가족들은 다들 벽에 붙어서 다닙니다. 그늘이 좁아지면 벌어지는 어깨싸움에서 누군가가 땡볕으로 밀려납니다. 그때마다 합종연횡이 이루어지지만, 동맹은 금세 깨지고 맙니다.


해가 지고 이들이 금식을 풀고 푸짐한 저녁을 먹는 이프타 모임에 갔습니다. 이슬람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두바이의 간단한 역사와 라마단 그리고 이슬람문화 전반을 설명해주고 이프타를 같이 먹는 흥미로운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프로그램을 주도하고 나서서 설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국인 혹은 미국인이었고 정작 이곳의 현지인들은 그들의 지도에 따라 묵묵히 음식을 차리거나 시범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왜곡된 중동의 현대사와 나아가 서구의 시선으로 정의된 세계사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살았던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illiam Said)의 삶은 영어와 아랍어가 섞인 그의 이름 만큼이나 모순적이었습니다.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하자 졸지에 그는 난민이 되어 카이로로 떠나야 했고 그곳의 영국학교에서 아랍인 사이드로 행동하기를 요구받았고,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는 미국인 에드워드로 살고 있었지만 어느 날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갑자기 다른 미국인들로부터 적국 스파이가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에 아랍인 사이드로 간주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그가 유행시킨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 만큼이나 그의 모순적인 운명은 동양도 서양도 아닌 중동이 가지는 위치와 의미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또한 이 땅에서 벌어진 영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의 음모와 협잡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세기 초, 강건했던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환자로 치부되던 당시에 제국의 영토를 잘라먹기로 결정한 사이크스-피코협정 (Sykes-Picot Agreement)은 과거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미국과 일본이 제 마음대로 지배권을 나눠가졌던 카스라-태프트밀약(Taft–Katsura agreement)과 똑같은 짓이기 때문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토착 부족들을 감언이설로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가차없이 외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등 뒤에 칼을 꽂고 비밀 협약을 맺던 당시의 강대국들은 이 지역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풀리지 않을 저주를 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나온 것 같은 미지의 붉은 사막을 배경으로 하는 신념과 의지 혹은 의리 같은 낭만 따위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 땅과 사람들을 단순히 영향력 확대와 자원 확보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체계의 적나라한 욕심(naked interest)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아랍과 중동이라는 단어는 오일달러를 움켜쥔 비굴한 무리라는 이미지와 등치시켜 집단적 상상력으로 뭉뚱그려 형상화됩니다. 결국 우리는 아직도 그들이 만든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로맨스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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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밤은 짧습니다. 늦게까지 이어지는 이프타의 향연을 마치고 돌아와 조금 있으면 아침 예배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는 호텔 방마다 있는 메카를 향한 화살표에 따라 기도를 시작합니다. 10시 이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가족에게 양해를 얻습니다. 가족들이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수다를 떨고 있을 무렵이면 라운드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미레이트 골프 클럽은 유러피언리그 오메가 데저트 클래식과 레이디스 마스터즈를 개최하는 곳으로 2016년 골프다이제스트 세계 100대 코스에서 95위로 꼽힌 곳입니다. 예약을 도와주던 호텔직원이 마질리스 Majilis 코스와 팔도 Faldo 코스 중에서 마질리스를 추천합니다. 두 코스 모두 그린 에어레이션 중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로 봐서는 골프를 치는 사람인 것 같아 믿음이 갑니다.


아침 7시가 채 안됐는데도 기온은 벌써 30도에 육박합니다. 클럽을 대여하고 기념품 몇 개를 사서 드라이빙 레인지에 잠시 들러 연습볼 몇 개 치고 있자니 내 이름을 부르기에 혼자 카트를 몰고 1번 홀에 거의 다 왔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남의 카트를 몰고 온 것입니다. 카트를 돌리려다 보니까 저기 멀리 보이는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어떤 사람이 왔다 갔다 분주합니다. 아마도 이 카트를 잃어버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친절한 스타터가 나 대신 가져다준 내 카트에서 클럽을 꺼내고 티샷 준비를 하는데 뒤통수가 따갑습니다. 영국에서 왔다는 싱글 플레이어 한 명과 조인하라고 하는데 듣는둥 마는둥 얼른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습니다. 허둥대는 내가 생짜 초보로 보였는지 영국친구가 두번째 홀을 마치자마자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휙 가버렸습니다.


3번 홀에서 혼자가 되자 나도 약간의 여유가 생겨서 면세점에서 딱 하나 사 온 시가를 피우며 잠시 서서 주변 경치를 구경하다가 이제부터라는 생각으로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페어웨이와 아주 짧은 러프를 벗어나면 온통 모래밭입니다. 골프장은 당연히 푸른색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풍경이지만 의외로 사막과 푸른 잔디가 썩 잘 어울립니다. 이 모든 잔디와 나무가 땅속으로 연결된 수도와 스프링쿨러로 유지된다고 생각하니 호텔 컨시어지가 왜 이 골프장을 사막의 기적이라고 말했는지 실감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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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와 잔디 그리고 뒤편의 높은 건물들이 광고사진처럼 펼쳐진 8번 홀. 사막의 황량함과 현대 도시의 대비를 밤에 본다면 어떨까 궁금합니다


16번 홀 티박스에 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입니다. 자신도 싱글 플레이라면서 같이 플레이하자는 그 사람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는데 자꾸만 내게 영어로 한국말 잘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나도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남은 몇 홀을 같이 합니다. 오늘 라운드의 마지막인 홀에 다다르자 아까 라운드를 시작할 때의 실수로 정신없이 지나간 몇 홀이 아쉽습니다. 언젠가 다시 왔으면 하며 라운드를 마칩니다.


* * * *


한 낯의 땡볕이 아이들에게 너무 뜨거울것 같아서 호텔 프론트에 가서 우산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내 입장에는 너무 평범한 부탁인데 호텔 담당자가 무척 당황합니다. 미안하지만 방에 가서 좀 기다려달라고 하기에 그제서야 이들에게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일 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섣불리 무엇인가를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해도 내가 가진 시선은 편협할 뿐 아니라, 그나마도 나와 같지 않은 것에 대해 너그럽지 않은 폐쇄성에 의해 더욱 왜곡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것이 아닌 시각을 가질 수도 없거니와 나라는 주체성을 배제한 그 중립성이란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당신은 노안때문에 책을 읽기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는 그게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내 차례가 되자 그제야 깨닫습니다. 당신과 내가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더라도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부모와 선생은 존경의 대상이자 동시에 멸시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고 즉자적인 것을 믿을 내 아이들은, 비슷한 모양이면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사막에 갔습니다. 모래 위에 적어 놓은 글씨와 그림이 바람이 불면 금세 지워지는 게 신기한 작은 아이는 모래에 손발을 묻고 연신 친구 이름도 적었다가 I Love Dubai도 적었다가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목로주점의 가사처럼 낙타를 사지는 않았지만, 사륜구동 자동차로 모래언덕을 달리고 사막 위로 떨어지는 해를 보며 베두인 마을에서 전통 공연과 음식 그리고 물담배 샤샤로 하루를 보냅니다. 천지구분 없는 사막에서 로렌스를 파이잘왕자에게 안내했을 베두인이 저런 옷을 입었겠거니 하는 상상 위로 초승달이 떠 오르고 이곳의 짧은 밤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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