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uffs, Ho Cham Strip, Vietnam
베트남 남쪽 바닷가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베트남을 생각하면 전쟁 영화가 떠오릅니다. 전우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진 미군 병사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헬기를 향해 필사적으로 팔을 휘젓는 모습이거나, 초콜렛 상자를 들고 옛 여자 친구를 찾아온 전역군인, 아니면 미스 사이공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과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비슷하리라 짐작됩니다. 주인공은 백인이고 동양인은 죽여야 할 적이거나 주인공을 보조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2017년 골프다이제스트에서 꼽은 세계 100대 코스에서 74위로 선정된 블러프 the Bluffs입니다. 가난한 공산주의 국가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골프코스가 있다는 사실과 세계 100대 코스 중 아시아의 골프 코스가 12개밖에 없다는 것에 잠시 인지부조화를 느낍니다. 골프가 풍기는 이미지가 공산주의와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세계 인구의 60% 이상이 아시아에 살고 있으며 세계 총생산의 40%가 이곳 아시아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턱없이 작은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골프가 영국에서 기원하고 미국에서 붐을 이룬 스포츠이기에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오늘날의 세계가 구축되고 해석하는 관점이 서양에 의해 확립되었고 부지불식간에 강제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和하지만 同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숨길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the Bluffs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는 포커 게임에서 사용하는 속임수를 의미하는 블러프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러나 곧 그 뜻이 깎아지른 절벽 혹은 침식으로 만들어진 거친 지형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백상어 그렉 노먼이 만든 코스답겠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언젠가 가보고 싶다고 생각과 동시에 왜 이렇게 먼 곳에, 베트남의 경제 수도라 불리는 호치민에서 차로 빨라야 2시간이 걸리는 외딴 바닷가에 베트남에서 제일 비싼 골프장을 지었을까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그 의문은 호치민과 호참스트립(Ho Cham Strip)의 그랜드 호텔리조트를 왕복하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풀렸습니다.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 중에서 외국인은 나를 포함한 한국인 몇 명과 서양인 둘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베트남 사람들을 가난하고 근면한 노동자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로는 비판하지만 나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한 패거리였던 것입니다. 이들도 우리와 다름없이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이고, 채무자이면서 또한 채권자입니다. 우리처럼 이들도 가족과 외식을 하고 주말에는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어떻게 그동안 망각하고 살았나 싶습니다. 언젠가 이들은 서울로 향할 것이고, 베트남에 놀러 갔다가 가짜 양주를 마시고 머리가 아파서 고생했다는 식의 흔한 무용담을 서울에 다녀온 베트남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는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호치민 중심지에서 출발한 셔틀버스가 목적지인 그랜드 호텔리조트에 도착했습니다. 호텔 건너편으로 도로를 따라 오늘의 목적지인 더 블러프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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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하우스가 무척 세련되어 보입니다. 기념품 몇 개를 사고, 몸을 풀 겸 연습장에 들러 연습공을 몇 개 치고 오늘의 라운드를 시작하기로 합니다. 오늘은 나 혼자입니다. 네 시간의 여유롭거나 고독한 시간을 함께 할 캐디에게 카트 운전을 맡기고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 온 시가에 불을 붙입니다.
동반자 없이 혼자 온 싱글 플레이어는 골프장이 정하는 다른 사람과 조인해서 플레이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가는 곳에서 처음 본 사람들과 4시간 넘도록 어울리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내가 집중하고 있을 때 딴짓을 해서 신경을 거스르는 생짜 초보를 만날 수도 있고, 엄청난 고수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연 덕에 늘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만 만나고 어울리게 되는 사회적 규정성을 탈피해서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편의점을 운영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가 계산대 반대편에 서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들어 보기도 했고, 불륜 남녀 틈새에서 내내 불편하기도 했고, 스윙에는 정도가 없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준 사람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이 라운드가 끝난 후까지 이어진 때는 없었지만, 같이 게임을 하는 동안만큼은 게임의 룰 속에서 서로를 배려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며 피부색과 언어, 종교와 국적을 넘는 관용과 공존하는 세상이 책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놀이는 일련의 진입장벽 위에 세워진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게임이 끝나면 다들 아무 일 없었던 듯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역사 동안 공고히 이어져 온 구분과 차별이 얼마나 세밀하고 치밀하게 모든 곳에 침투해 있었는가를 곱씹게 됩니다.
오늘은 화이트 티 대신 블루 티를 쓰기로 합니다. 같은 코스라도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다른 레이아웃과 그에 따른 챌린지를 주기 때문에 비록 스코어는 좋게 나오지 않더라도 처음 가는 곳이거나 이름 있는 곳에 갈 때면 블루티를 선호하곤 합니다.
첫 홀 티박스에 도착해서 전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페어웨이가 어지간한 학교 운동장 보다 넓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코스를 어렵게 만들기로 소문난 그렉 노만이 어쩐 일로 이렇게 여유 있고 편안한 시작을 허락했을까 싶습니다. 소위 shared fairways입니다. 그래서 1번 홀의 페어웨이가 클럽하우스로 돌아오는 9번의 페어웨이와 붙어 있기 때문에 어지간히 미스 샷을 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마음이 여유롭습니다. 차례를 기다리며 나를 지켜보고 있는 뒷팀의 시선이 부담되지 않는 편안한 스타트입니다.
그러나 이내 첫 홀에서 느꼈던 편안함은 없어지고 명불허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적당히 티샷을 하고 그린 주변에서 적당히 칩샷을 하면 되겠지 하는 내게, 내리막 끝에서 불쑥 솟아오른 포대그린과 깊은 벙커들이 얕은수 쓰지 말라고 고개를 흔듭니다. 그리고 V자 언덕 사이로 손바닥만큼 보이는 페어웨이에서 티샷 미스를 절대 용인하지 않겠다는 그렉 노먼의 의지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눈높이로 보는 원근감 없는 전경이 실제 모습과는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그리고 골프 코스 설계자로 그렉 노만은 그 차이를 골프 게임을 위한 장치로 얼마나 효과적으로 얼마나 잘 쓰는 사람이자 독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전반을 마치는 397야드 9번 홀의 두 번째 샷 지점에서 골퍼들을 속 편하게 클럽하우스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그렉 노먼의 강한 의지에 맞부닫칩니다. 세컨샷이 조금이라도 짧으면 깊은 벙커에 뻐지고 슬라이스가 나면 비탈진 언덕으로 한참 굴러갈 것 같습니다. 차라리 좌측으로 피하자니 덤불과 모래밭이 가득하고 안전하게 가려니 눈앞에 빤히 보이는 그린이 너무 유혹적입니다. 나는 여기서 공격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내 공은 그린 옆의 언덕을 때리더니 빨간 말뚝 아래 비탈로 하염없이 굴러 내려갑니다. 실패를 인정하고 해저드 드롭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이었지만 저 밑에 멀쩡히 보이는 공에 홀린 듯 내려가 급경사에서 친 서드샷이 홈런이 됐고 다시 몇 번을 허덕이다가 그린에 도착했습니다. 저쪽에는 이제 막 오늘의 라운드를 시작하려고 1번 홀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어이 친구들, 오늘 고생 좀 할 거야 하고 외쳐주고 싶습니다.
** 전반을 마치는 9번 홀의 그린 주변의 가파른 언덕에서 캐디는 아래로 굴러온 내 공의 위치만 확인해주고 휙 돌아서 갑니다. 여기서 나는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가야 할지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
12번 홀 내리막 티샷을 마치고 세컨 지점으로 이동하다가 the Bluffs를 광고하는 사진에서 많이 보던 풍경이 보여 잠시 멈춰 서서 둘러봅니다. 블러프라는 명칭에 어울리게 인간의 시간보다 몇십, 몇백 배나 긴 자연의 시간 동안 쓸리고 깎이고 움직여서 만들어진 바닷가 모래언덕에 길을 내고 잔디를 씌워 만들어진 코스라서 보통의 링크스 코스와는 달리 상당한 업다운과 물결치는 언듀레이션이 있습니다. 잘 관리된 페어웨이와 빠른 그린, 그리고 실수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선한 웃음의 사진과는 달리 왜 그렉 노만이 백상어로 불리는지 알려줍니다.
17번 파 4를 만나면서 이제 the Bluffs와 헤어질 준비를 합니다. 내가 계속 투덜거렸기 때문에 당신이 오해할까 봐 걱정됩니다. the Bluffs는 참으로 멋진 곳이라고 당신에게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비겁하지 않습니다. 티를 꽂고 앞을 보면 어디로 쳐야 할지 막막합니다. 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차분히 보면 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이 분명합니다. 그린에 올라가면 오르막이 내리막으로 보이고, 우측과 좌측을 고민하게 만들지만, 내가 내린 결정의 결과에 수긍하게 됩니다. 다른 여느 곳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 않는 라이를 숨겨두지 않았고 억지로 구겨 놓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지나온 홀들의 기억이 한참 후에도 선명합니다. 언젠가 당신이 이 코스에서 플레이하며 어떤 표정의 그렉 노만을 떠올릴지 궁금합니다.
이제는 정말 이별입니다. 18번 티박스를 떠나면서 올려다보니 그린 위쪽 클럽하우스에서 이 홀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전반을 마치면서 내가 1번 홀 대기 줄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을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고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좋은 마무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그래야만 오늘 게임을 망친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좋은 게임을 했던 사람에게는 나도 저랬어하는 우쭐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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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번 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 이른 저녁 식사를 합니다. 멀리 그랜드 호텔과 바닷가가 보입니다. 넓은 부지에 들어선 현대식 건물들이지만 다소 허술해 보입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섬세함이 빠져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디테일이 채워지는 데 얼마나 걸릴지, 아니면 그때가 되기 전에 게임의 법칙이 달라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몇 년이 지나서 도로를 따라 어지럽게 뭉쳐있는 전깃줄이 정리되고 호텔 주변 공사가 마무리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득 그때가 되면 내가 여기에 다시 오고 싶어 할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아귀가 맞지 않는 지금과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정비된 미래 중에서 내가 어느 것을 더 좋아할지, 아니 어느 것이 옳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호치민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늘의 게임을 생각해 봅니다. 연습장에서 매번 비슷한 셋업과 같은 클럽으로 공을 쳐대는 아마추어에게 오늘의 샷은 과거의 좋았던 샷들의 총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과거만을 뽑아서 현재를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현재는 과거의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이 무작위로 뒤섞인 랜덤 집합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합니다. 나는 시간 혹은 기타의 방법으로 계량화된 과거의 총합인가, 그러면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차창 밖으로 대여섯 살 여자아이를 벌거벗겨 세워놓고 목욕시키는 동네 아주머니의 모습이 지나갑니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 같은 골목들이 이제는 여행자인 내게는 아득히 멀지만, 이들에게는 방문을 열면 바로인 곳으로 이어집니다. 등짝을 때리며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치던 억센 아주머니와 어린 딸들이 젖은 몸을 말리며 들어갔을 골목 안의 풍경을 보기에는 달리는 자동차가 너무 빠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