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가까이 있어서 소중함이 잊혀진 것의 가치

Ponderosa , Johor Bahru, Malaysia

by 달을보라니까


오늘 아침은 좀 특별한 아침입니다. 밤 11시에 시작한 라운드가 9홀을 세 번째 마칠 무렵에야 맞는 아침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한동안 매주 금요일에는 밤새도록 라운드할 수 있도록 24시간 개장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도입해서 직장인들에게 꽤 인기 있었던 말레이시아 최남단 조호바루의 폰데로사 골프장입니다.


싱가폴에서 국경을 넘어가야 하지만 자동차를 타고 간단한 출입국수속으로 갈 수 있다 보니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다리 너머의 나라와는 매우 다른 곳입니다. 높은 첨탑과 기하학적인 문양, 히잡을 둘러쓴 여자들 그리고 몇 시간마다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는 이곳이 내가 속한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임을 일깨워 줍니다.


세상의 모든 전통과 풍습을 압도하고, 그 앞에서는 그 어느 것도 당당할 수 없게 만드는 돈과 자본주의에 대항해 "no inflation, no unemployment, no exploitation and no poverty"을 외치는 이슬람은 자본의 축적과 회전, 착취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계 인구의 20%가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많은 산유국들이 율법을 뒷받침한다고 해도, 이슬람은 자본주의라는 유사종교와의 경쟁에서 승기를 잡지 못합니다. 그들이 내건 기치만큼의 단단한 진영을 형성하지 못할 뿐아니라 실제로는 교리를 정면으로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는 자본의 법칙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세상이 얼마나 비슷해지고 있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의 가치는 독특해 보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착취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사회는 없다고 결론지었던 당신과의 대화가 떠오릅니다. 노예노동에 기초한 고대 문명들도 그렇고, 식민지 경영에서 원시축적을 이룬 자본주의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슬람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지만, 이들의 눈은 우리가 보고 있는 효율성과 확대재생산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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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인 플레이입니다. 평소에는 절대 불가능하지만 오늘같은 심야 라운드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골프장은 동반자들 모두 적게는 서너 번, 많게는 십여 회 이상 와봤던 곳이라 다들 거침이 없습니다. 연습 그린에서 공 한 번 굴려 볼 새도 없이 골프백이 실려 있는 순서대로 팀이 정해지고 나면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티를 던져 순서를 정하면 바로 시작입니다.


즐거운 라운드입니다. 밤이슬을 먹은 그린은 50m 어프로치에도 깊은 피치 마크가 날 정도로 부드럽게 높은 탄도의 어프로치 샷들을 받아 주고, 젖은 그린은 느리다는 말을 무색하게 하는 빠른 그린에 다들 웃고 떠들며 편합니다. 6인 플레이는 다들 꽤 분주합니다. 동반자들의 리듬에 맞춰 같이 움직여야 하고, 캐디가 없는 라운드라서 서로 날아가는 공을 봐주고 카트 운전하고 스코어도 챙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여러 번 와본 구장이라 무리 없이 진행됩니다만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적당히 넘어가기도 합니다.


4번 홀에서 여섯 명 중에서 두 명의 공이 좌측 해저드 쪽으로 향합니다. 경험적으로 저 정도면 아웃이겠구나 싶지만, 같이 주변을 찾아봅니다. 아무리 라이트가 켜 있어도 원래 가야 할 길을 벗어난 공을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다. 겁만 줬을 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해저드는 공 두 개를 삼키고 말이 없습니다.


한차례 소동이 지나간 후 다음 번 홀 티박스에는 정적이 흐릅니다.


잠시의 고독. 우리는 같이 서 있지만, 서로가 자신만의 우주에 서 있습니다


7번 파4는 시그니처 홀입니다. 화이트에서는 해저드를 가로질러 프린지까지 과감한 티샷을 날려 볼 수도 있고, 안전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단번에 그린에 가겠다며 온 힘을 다해 드라이버를 휘두르고 누군가는 보수적인 전략을 택합니다. 그러나 다들 원래 계획했던 방식으로 그린에 도착합니다. 최선을 다 하지만 아무도 장담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이런 것이 골프이자 인생인것 같습니다.


어느 짧은 파3에서 아무도 원온을 못 했다는 이유로 카트를 뒤로 돌려 다시 파3로 되돌아갑니다. 밤은 길고 오늘은 어디든 몇 번이고 다시 올 수 있다는 자유로움에 다들 여유롭습니다. 기다릴 새벽이 없는 한밤의 골프이기에 느슨한 시간이 천천히 가는 줄 알았는데 잠시의 방심을 틈타 아침이 오고 오늘의 기억은 희미한 역광 실루엣으로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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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만나 같은 차량으로 이동해서 라운드를 마치고 같이 벌거벗고 샤워하고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물론이고, 식사 후에도 술자리가 이어지곤 하는 한국에서의 통상적인 골프 라운드는 18번 홀에서 악수하고 헤어지는 외국 사람들과의 라운드와는 사뭇 다릅니다. 필립이라 불리고 코난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만나는 동안 서로를 배려하고 친절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든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몇 번의 이별을 거친 아이들은 이제 더 울지 않습니다. 서운하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그 말이 상처가 될까 봐 그리고 슬프다고 해도 잠시 보듬어 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서 그냥 그러냐고 하고 맙니다.


떠나기 전에 뒤를 돌아봅니다.

가까이 있어서 소중함이 잊혀진 것의 가치.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오늘 아침 5시 54분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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