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한설 Feb 02. 2023

Slice of Life #7 - 자존

Slice of Life

이건 나는 게 아냐. 폼 나게 떨어지는거지.


This isn't flying. This is falling with style. 


- 존 라세터, <토이 스토리>



출처: <토이 스토리>


혈액형에 따른 성격 유형과 MBTI를 모두 신뢰하지 않는다고 항상 떠벌리고 다니는 저이지만, 수줍게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MBTI 테스트를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 두 번이나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물론 저는 두 번의 테스트 결과를 모두 기억하지 못합니다(저는 당당합니다).


첫 번째 테스트는 지난 직장에서 제주 워크샵을 갈 때 MBTI 전문가인 - 하다 못해 이제 MBTI까지 전문가가 있더라고요 - 딜런의 지인분이 저희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MBTI 테스트를 해 주고, 팀별로 성향 및 상성 분석을 해 주었을 때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A 유형이고, 저와 일을 하는 후배들이 B, C 유형이라고 하면, 서로 합을 맞춰 일을 하기 위해서는 A 유형의 리더는 이러이러한 성향이 장점이 되고, B, C 유형인 후배들은 이러이러한 장점을 잘 살리고 저러저러한 지점들을 유의해야 한다는 형태의 조언들을 주었습니다. 


음... 인정하기 싫지만 솔직히 그럴 듯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분석 결과를 신뢰하지는 않았습니다(다시 말하지만 저는 당당합니다). 누군가가 저에 대해 아는 척 하는 것이 그렇게 싫더라고요. 이봐요 아저씨, 저희 부모님도 저를 몰라요. 


두 번째 테스트는 최근에 동료 한 분이 강하게 권해서 하게 되었는데요 - 라고 핑계를 대기는 하지만 사실 살짝 궁금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쑥스럽네요.


두 번째 치른 테스트는 첫 번째 테스트와 사뭇 달랐습니다. 기존의 I-E, S-N, T-F, J-P의 구분 외에 A-T가 추가되어 있었습니다. 


A는 Assertive의 머릿글자이고 T는 Turbulent의 머릿글자입니다. 이는 각각 "자기확신"과 "민감"을 의미합니다. Assertive는 단호하게 주장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 assert를 떠올리시면 이해가 쉬우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Turbulent는 우리가 비행기를 탈 때 한 번 씩 겪는 난기류, turbulence가 가지는 의미와 같이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쉽게 영향을 받는 성향을 의미합니다. 


저의 테스트 결과는 자기확신 성향이 가뿐히 90%로 나왔습니다. 


압도적이었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신뢰가 가는 결과였습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지. 듣기 좋은 말은 또 바로 받아들여야지요. 저는 열린 사람이니까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저는 자존감이 아주 높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저는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반면 저는 자존심이 그렇게 세지 않은 편인 것 같습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일 때가 많습니다. 살면서 누군가를 이기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적이 - 물론 있기야 하겠지요 - 오랜 과거까지를 반추해 보아도 거의 없는 듯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대단한 평화주의자입니다.


저는 못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역시나 당당하게 말 하자면, 사실 잘 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요리도 못합니다(라면은 끓일 줄 압니다). 운전도 못합니다(자전거는 탈 줄 압니다). 수영도 못합니다. 전구도 갈아 끼우지 못합니다. 가구를 조립하지 못합니다. 고기도 못 굽습니다. 청소도 못합니다. 분리수거도 못합니다. 힘도 세지 않습니다. 길도 못 찾습니다. 각종 비밀번호와 물건을 둔 자리를 항상 까먹습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수십가지는 더 늘어놓을 수 있는 저의 무능과 쓸모 없음은 저의 자존감과 하등의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인걸요. 제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이는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글자 하나 차이지만, 내포하고 있는 뜻은 대서양과 태평양만큼, 남극점과 북극점만큼, 태양과 달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외골격이 유난히 발달한 사람들을 가끔 만납니다. 


자존심의 발현에 다름 아닌 목의 핏대와 높은 피치의 목소리, 고함에 가까운 박력과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자기 주장과 논리로 무장한 분들입니다. 경직되어 있다는 측면에서는 갑각류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때로 대답이 아닌 질문을 유도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저는 반드시 그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그 질문을 해 달라고 그렇게까지 강렬한 눈빛으로 저를 쏘아보시는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도리로 마땅히 질문을 해 드려야만 합니다. 


"혹시 대학은 어디를 나오셨는지요?", "혹시 댁이 어디이신지요?", "혹시 이전 커리어는 어디를 거쳐 오셨는지요?" 따위의 질문들이, 제가 해야만 하는 질문들입니다.


저는 그들 모두에게서 웅크린 7세 어린이를 봅니다. 제가 대단한 통찰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 또한 당신처럼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볼 수 있는 것 뿐입니다. 그들의 갑옷과 칼, 계속되는 유도심문 때문에 지치다가도, 문득 그 아이를 보면 한 번 끌어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벅차도록 아름다운 사람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면, 더 나아가 본인이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까지 여기는 것을 보면 그저 먹먹한 마음이 됩니다. 역시 제가 대단해서 그 감정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저 또한 무능한 존재이기에 그 마음의 발원점을 알 것 같은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딱 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인가를 능숙하게 하지 못 한다는 사실("발원점")과 그렇기 때문에 내가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는 결론("발화점") 사이에는 그 어떠한 논리적인 연결고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세상이 그저 그것이 인과론적 귀결인 것처럼 홀로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세상의 의견이고 주장일 뿐입니다. 발원점에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순간, 바로 그 때 냉기를 차단해야 합니다. 발화점까지 갈 이유가 없습니다. 


어쩌다가 미끌어질 때도 있겠지만, 그 때는 굳이 억지로 기괴한 자세로 서 있으려 하지말고 그저 폼 나게 떨어지면 그만입니다. 


죽지 않습니다. 


훌훌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고, 천천히 다시 걷기 시작하면 그만이며, 걷기에 적응되면 다시 달리면 그만입니다. 


You are loved.




작가의 이전글 Slice of Life #6 - 명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