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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한설 Jan 23. 2023

Slice of Life #6 - 명절

Slice of Life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 한시외전




누구나 그렇듯 저 또한 어렸을 때 명절을 참 좋아했습니다. 


명절 연휴가 며칠일 것이냐는 매해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대체휴일이 없던 시절이라, 명절이 금토일 또는 토일월이 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때의 상실감배신감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심정으로 부들부들 떨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반대로 월화수 또는 수목금이 되는 명절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습니다. 학교를 안 가는 기간이 긴 것은 물론 좋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길다는 것 때문이었던 듯합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집은 기와집이었고 대청마루와 처마 그리고 마당이 있었습니다. 강아지를 키웠던 시절도 있고, 닭과 꿩, 비둘기를 키운적도 있습니다(닭과 비둘기는 그렇다쳐도 꿩은 대체 왜 있었던 걸까요). 비둘기는 암수 한 쌍을 키웠는데, 낮에는 멀리 날아가서 놀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와 잠을 잤습니다. 제비는 언제나 처마 밑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여느 시골집이 그러하듯 할머니께서 가장 큰 어른으로 같이 사셨고 - 엄밀히 말해 할머니의 집이었지요 - 분가를 하지 않은 작은아버지 내외와 제 사촌 동생들도 같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집은 평소에도 사람들로 북적일 때가 많았습니다. 낮에는 동네 친구들과 뛰어 놀다가 저녁이 되면 할머니께서 해 주신 저녁을 먹고, 식혜를 마시고, 대청마루에서 까무룩 잠이 들고는 했습니다. 에어컨이 없던 집이었지만 마루 덕에 여름에도 시원했고, 밤이 되면 각종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일곱 명의 자식을 보셨습니다(할머니, 존경합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정말 집이 떠나갈 듯 시끄러웠습니다. 여섯 작은아버지, 고모님들의 가족이 모두 도착하면 집안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핸드폰이 없던 그 시절, 보고픈 사촌 형, 누나, 동생들이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으니 마루에 걸터 앉아 대문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 넉넉할 게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명절만은 달랐습니다. 젖과 꿀이 흘렀다는 전설 속 그 곳처럼, 명절에는 소고기와 해산물을 질릴 때까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아버지와 고모님들은 손이 크신 분들이라 명절 때는 용돈도 넉넉히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걸로 M16, 스미스 등 간절히 갖고 싶었던 BB탄 총이나, 부루마불, 도미노와 같은 비싼 보드 게임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린 그것들을 가지고 놀고, 어른들은 고스톱을 곁들여 음주가무를 즐기고 하다보면 명절 연휴가 정말 총알같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워낙 촌이다보니 작은아버지들의 처가, 고모님들의 시댁도 거의 고향에 있었던 것도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냥 도보로 우리집과 처가, 시댁을 계속 왔다갔다 하면 되니까 명절 기간 내내 사랑하는 동생들과 같이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놀고, 놀다 지치면 또 자고 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명절이 마냥 좋기만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채 어린 아이의 특권만을 가지고 있었던 - 즉,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 시절이었기 때문이었겠지요. 당시에도 어른들은 지금 우리가 골머리를 앓는 그런 여러 문제들로 속이 복잡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희 집의 명절 풍경은 몇 번의 변곡점을 맞이했습니다. 


첫 번째 변화의 물결은 우리 세대들이 대학을 가고 난 후 밀려왔습니다. 이 때는 우리도 이미 머리가 굵어진지라, 친구가 제일 좋을 때였습니다. 명절이 되면 오랜만에 들른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가방만 던져놓고 바로 나가서 오랜만에 만나는 고향 친구들과 동이 틀 때까지 술을 퍼 마셨습니다. 차례를 지낼 때면 숙취 때문에 절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질어질한 머리와 뒤집어지는 속을 부여잡고 떡국을 겨우 떠 먹었습니다. 


이 때쯤 집안의 큰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시면서 아버지 세대는 저희가 원래 살던 집을 처분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판에 박힌 뻔한 구조의 빌라로 이사하셨습니다. 지은지 얼마 되지 않는 새 집이었고 나름 널찍하고 깨끗했습니다만, 그 집에는 대청마루도, 처마도, 마당도 없었습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집은 그냥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우리들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직업을 구하고 결혼을 한 이후로는 사는 게 바쁘다보니 명절 때 고향에 가지 못하거나 고향에 가더라도 잠시 앉아있다가 처갓집으로 이동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온 식구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경우는 드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식사를 같이 한 끼 하더라도 식사를 마치면 일어나기 바빴습니다. 


명절은 이윽고 의무가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 당연히 언제나 사랑하는 형, 누나, 동생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야 변함이 없었지만, 머나먼 길을 내려가는 것 자체가 고역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은 우리가 고향에 내려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습니다. 그 또한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기차표를 "광클"해서 운 좋게 구하든지, 그게 아니면 8~10시간 걸리는 버스를 - 그것도 워낙 촌이라 버스를 갈아타기까지 하면서 내려가야 했습니다. 


특히 결혼 후에는 본가와 처가를 모두 들러야 하는데, 제 고향도 깡촌이요, 제 아내 집도 깡촌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지방 출신이신 분들은 공감하시리라 믿는데, 촌과 촌을 연결하는 대중교통 수단은 없습니다. 그래서 대구 등 광역시로 이동해 다시 버스를 타고 촌과 촌 사이를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긴 여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면 몸도 마음도 말 그대로 녹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 되면 출근이란 걸 해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습니다. 일반적인 주말이면 그래도 이틀은 쉴 수 있는데... 하루도 쉬지 못하고 다시 출근해야 하다니요.


그 후 우리나라 명절 전체의 풍속도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절이 되면 당연히 고향집을 찾는 문화 자체가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들의 역귀성, 명절 전에 고향을 찾고 명절 연휴는 온전히 쉬거나 여행을 떠나는 풍경들이 낯설지 않게 되어 갔습니다. 


저희 집 또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설, 추석 당일만큼은 어떻게든 모여서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 후 점심식사를 같이 하려고 다들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하나 둘 빠지는 사람이 늘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몇 년 전, 아버지 세대 남매들 간의 결정으로 더 이상 공식적으로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는 것을 그만두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정을 공식적으로 통보 받은 후, 우습게도 가장 먼저 떠 오른 생각은 다행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의무가 되어 버린 명절 귀향을, 그 머나먼 행로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밀려들어왔습니다. 과도한 일을 핑계로 명절 전 주에 내려가거나 다음 주에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내려 가는 건 똑같으니 굳이 민족의 대이동의 물결이 국토를 뒤덮는 때에 갈 필요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자위했던 듯합니다.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친척 어른들과 동생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찾아뵙고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마음이란 걸 먹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오랜 시간 동안 보지 못하고 지내는 가족들이 많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다시 명절에 맞추어 남쪽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기차표를 구하는 건 여전히 하늘의 별따기요, 북적대는 사람들로 가득찬 역과 터미널, 휴게소를 가는 것은 고역입니다. 그런데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듯합니다. 


어제 뵌 친애하는 형님께서 촌철살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10대 중반이 지나면 부모에게 이별을 고하고 본인만의 세상으로 출정합니다. 부모님은 당연히 거기 그냥 계시는 분들이 됩니다. 나는 나 혼자 컸다고 굳게 믿습니다. 군대를 가게 되면 뭔가 잠깐 뭉근한 것이 올라오는 듯하지만 제대하고 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부모님은 오히려 내가 무언가 꿈과 뜻을 펼치는데 잔소리를 하고 걸림돌이 된다고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연로해지시면 - 무언가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갑자기 다시 나타나 효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 그것이 만고부터 내려온 우리네 자식들의 초상이라고요. 


이제 부모님들이 많이 연로해지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들이 세상에 함께 계셔 주심에 마음이 뭉클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번 명절에도, 효자 코스프레를 하러 내려갑니다. 


여러분 모두 사랑하는 분들과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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