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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Sep 18. 2023

오후 9시의 티타임

렌트한 숙소가 아닌 홈스테이 가정에서 호주에서의 시간을 보낸 건 큰 행운이었다. 홈스테이의 좋은 점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먹고 자고 사랑하며 사는 생활의 디테일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 동네엔 밤늦게까지 놀만한 데가 많지 않았고 차도 일찍 끊겼다. 덕분에 난 그 여름 무수한 밤을 앤과 덕이라는 다정한 노부부와 함께 보낼 수 있었다.


날 먹여주고 재워준 그 두 사람의 삶에는 여가가 자연스럽게 배어있었다. 앤과 덕은 주말이면 별 뜻 없이도 피크닉을 가거나 해수욕을 하거나 테니스를 쳤다. 이번주에는 이런 걸 하고 다음 주에는 저런 걸 하고, 이런 거창한 계획이 없이도 그랬다. '잠깐 시장에서 장을 봐올까?' 따위를 물을 법한 톤 앤 매너로 '잠깐 해변에 다녀올까?'라고 묻는 식이었다. (그들에게 숨 쉬듯 자연스러웠던 그 바다 골드코스트가 전 세계 서퍼들의 파라다이스라는 걸 알게 되기까진 5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런 삶의 태도는 한국에서 흔히 보는 부모세대의 것과는 분명히 달랐고 내게 약간의 동경심을 심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또 한 가지 내가 잊지 못하는 저녁 풍경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거나 TV를 보며 각자의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밤 9시쯤 다시 식탁에 둘러앉았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다. TWG의 티백 홍차였는데 앤은 거기다 우유를 아주 조금 탔고 덕은 그보다 많이 탔다. 뽀얀 홍차 두 잔이 놓인 그 식탁에서 두 사람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곤 했다. 가끔은 신문에 실린 스도쿠를 함께 풀기도 하면서. 할 말도 할 일도 없는 때조차도 일단 9시가 되면 어김없이 티타임이 시작됐다. 마치 어겨선 안 되는 하나의 의식처럼 말이다.


난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고 호주식 발음에는 정말이지 문외한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티타임 토크에 끼긴 힘들었다. 하지만 '차 한잔 같이 하겠니?'하고 물어보는 앤의 말씨가 다정했으므로 약간 수줍어하면서 늘 그러겠다고 했다. 어겨질 리 없는 약속처럼 돌아오는 그 풍경에 나도 속해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 멍청하게 앉아있는 것 외엔 할 일이 없더라도 말이다. 그 여름 밤들은 실링팬이 돌아가는 소리, 가끔씩 지붕을 울리는 도마뱀의 발소리와 함께 향긋한 홍차의 향으로 기억된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런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고된 하루를 보냈어도 함께 마주 앉아 홍차를 마시는 저녁은 반드시 올 거라는 것. 밤 9시 자연스럽게 식탁에 모여 앉는 광경은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듯했다. 두 사람이 마셔온 찻잔을 쌓아 올리면 얼마나 높은 탑을 이룰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끝없이 쌓아 올린 시간은 굴곡진 그들의 생이 쓰러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중심일 게 분명했다.


일상에 어떤 의식도 없는 생활에 대해서라면 아주 잘 알고 있다. 마음이 지칠 때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게 제일 쉬운 법이다. 나는 우울하면 스트레칭을 안 하고 밥을 안 먹고 청소를 안 하고 대신 잠을 잔다. 지금 근육을 풀어놔도 어차피 다시 굳을 텐데. 귀찮게 차려 먹어도 어차피 다시 배고파질 텐데. 치워도 다시 더러워질 텐데. 이런 생각이 한 번 들면 모든 게 덧없어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모든 걸 놔버리고 되는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무엇이든 내버려 두면 멈춰있는 게 아니라 뒷걸음질하는걸. 스트레칭을 안 하면 다리가 굳고 밥을 안 먹으면 몸이 고장 나고 청소를 안 하면 먼지가 쌓이고 쌓여 재채기가 나는 것처럼.


그저 홍차를 나눠마시던 그 밤을 떠올리면 그만인 것을. 앤과 덕이 그랬듯, 나를 살게 하는 것 또한 매일매일 쌓아 올리는 찻잔 같은 것이라고. 기어이 마주 앉아 다시 또 홍차를 우려내는 저녁이 있는 한 우리의 삶은 멈춰있는 게 아니라 힘 있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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