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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Sep 11. 2023

모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엄마랑 또 싸웠다. 초등학생 일기에나 나올 법한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려니까 자괴감이 들지만 이만큼 적확하며 진실에 부합하는 문장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싸웠다. 서로에게 큰 소리를 내면서 말 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한 마디로 못 봐주도록 유치하게 싸웠다.


30대 딸은 엄마랑 왜 싸우나. 시집을 안 가서? 철 없이 사고 치고 다녀서? 엄마의 등은 자꾸 굽어가는데 캥거루처럼 품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해서? 이런 통속극 단골 소재는 우리의 싸움과 거리가 멀다. 결혼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한 건 엄마고, 내 배짱은 사회적 체면 무시하고 사고 치고 다닐 만큼 두둑하지 않다. 스무 살부터 집에서 돈 한 푼 받아본 적 없기 때문에 캥거루족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우리는 싸운다. 내가 10대일 때도 20대일 때도 안 싸웠는데 30대가 되니까 자주 싸운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필구처럼 어린 내게도 유일한 삶의 목표는 엄마를 지키는 거였다. 마침 난 사지 멀쩡하게 태어났고 체력도 나쁘지 않았고 영특한 편에 속했다. 운 좋게 대학도 갔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 배쯤 넓은 기회의 문이 열릴 거라는 것. 열아홉 겨울, 이제 막 안온한 교실을 벗어난 주제에 자신의 가능성을 과신하기 쉬운 그때, 난 빠른 시일 안에 대단한 뭔가가 될 거라고, 비로소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무능했다. 1인분의 삶 이상을 책임질 만큼의, 그러니까 엄마의 굽은 등을 펴게 할 만큼의 가능성이란 건 내게 없었다.


돌아보면 10대에도 20대에도 내가 엄마랑 싸우지 않은 이유는 엄마에게 미안해서였다. 엄마 역시 같은 이유로 나와 싸우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와 나의 관계란 서로에게 뭔가를 더 해주지 못해서 안달했다가 각자의 한계를 깨닫고 좌절하는 가운데 얽혀있는 무언가였다. 둘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지혜로운 어른인 박은 딸은 커서 엄마를 닮고, 아들은 커서 아빠를 닮기 마련이란 얘길 한 적이 있다. 나는 박에게서 이 말을 듣기 전부터 그 뜻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랬던 엄마와 내가 요즘은 왜 싸우는가. 미안함이 사라져서? 그건 아닌 것 같다. 엄마는 아직도 내가 집에 갈 때마다 바쁜 시간을 쪼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준다. 나는 일 끝나고 밤늦게 고향에 도착하더라도 엄마 가게에 들러 마감을 돕는다. 우린 여전히 서로에게 뭔가를 해주지 못해 안달이다. 다만 미안한 마음 아래 감춰뒀던, 제대로 내놓지 못했던 상처가 이제야 곪아터진 것뿐이다. 우리는 그동안 '싸우지' 않았다. 사랑하는 만큼 밉더라도 미안하니까 삭이고만 말았다. 10년, 20년 묵은 감정들이 이제야 얼굴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뿐이다. 그것도 유치한 어린 시절의 모습 그대로.


엄마랑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따지다가 전화를 끊었는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나왔다. 이 유치함이 황당했고 한편으로 후련했다. 또다시 딸은 커서 엄마를 닮고, 아들은 커서 아빠를 닮기 마련이란 박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엄마와 나는 싸울 때조차 이렇게나 닮았구나. 이게 우리를 묶어주고 있는 인연의 모양이며 함께한 시간의 결과구나.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정확한 사과의 말없이도 화해할 거라는 걸.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물쩍 넘어가고는 언제나처럼 서로의 곁에 있을 거라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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