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시 Sep 04. 2023

one summer drive

노래로 기억되는 순간들

스물다섯 겨울에는 종종 자전거를 타고 호주 브리즈번의 야경을 가로질렀다. 그때 나는 영화 <비긴 어게인>에 나온 노래 Lost Stars(애덤 리바인이 아닌 키이라 나이틀리가 부른 버전이어야 했다)에 빠져있었으므로 귀를 틀어막은 이어폰에서도 늘 그 노래가 나왔다. 지구 반대편 그곳은 여름이었다. 선선한 밤공기와 서울과 사뭇 다른 빛깔의 야경은 키이라 나이틀리의 꿈같은 목소리와 잘 어울렸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페달을 밟으면서 몇 번이고 그녀의 노래만 반복해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이 노랠 들으면 그날 브리즈번의 공기가 맡아지는 것만 같다.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노래로 기억되는 여행은 이후에도 더 있었다. 코다라인의 Love will set you free을 들으면 웅장한 파도가 끝없이 몰려오던 강릉 바다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뉴진스의 Attention을 들으면 코타키나발루의 청량한 물빛이 떠오른다. 여행지에서 뿌린 향수로 여행을 추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 경우는 후각보다는 청각 쪽이다. 한 줄의 가사가 잊었다고 여긴 어떤 날로 날 잡아끌 때마다 노래가 가진 힘을 속수무책으로 실감하곤 한다.


가족들과 동해바다로 떠나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거리가 제일 가깝다는 이유로 택한 낯선 여행지 영덕은 지나치게 전형적인 바닷가처럼 보였다. 어딜 가나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고 지나치게 현실적인 대게 모형이 걸려있는 대게 거리는 거부감까지 들었다. 도착하기 전부터 철 지난 유행가와 호객꾼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가보니 영덕은 (대게 거리만 빼면..)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은 한적한 동네였다. 오히려 어촌마을에 가까워 투박하고 정겨운 인상을 줬다. 짙은 푸른색으로 깊게 흐르는 바다 또한 투명한 빛을 띠는 강릉 바다와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밤에 항구에서 보낸 시간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숙소 앞 항구를 산책하던 우리는 오징어잡이 배 불빛이 일렁거리는 항구의 낭만에 취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붉은 달이 밝게 빛나고, 멀리 해변에서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폭죽을 터뜨리는 그런 밤이었다. 마침 주변에 사람도 한 명 없겠다, 음악을 틀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도록 엄마와 나, 동생이 공유하는 시절의 유행가가 플레이리스트에 담겼다. 엄마의 신청곡인 쿨의 one summer drive를 시작으로 듀스의 여름 안에서, DJ DOC의 여름이야기 같은 추억의 노래들이 줄줄이 나왔다.


엄마가 흥얼거리는 노랫말들을 듣는데 문득 엄마아빠 손을 잡고 동해바다로 피서를 떠났던 여름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엄마를 잃어버릴까 손을 꼭 잡고 해변을 걷던 아이가 이제는 엄마와 나란히 맥주를 기울이고 있다. 지금 듣고 있는 노래를 그때도 함께 들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과거로 시간을 여행하듯 아득한 기분이었다. 엄마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무엇을 추억하고 있을까? 마찬가지로 어린 우리와 보냈던 여름일까,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일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앞으로 one summer drive를 들을 때마다 소금기 어린 바람에 실려 바다로 퍼지던 엄마의 노랫말들이 떠오를 거란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