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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Oct 09. 2023

그냥 내가 알아서 한다고!

F의 싸움 단 한마디 말로도 시작될 수 있다. 최근 나는 애인과 별거 아닌 일로 다퉜다. 이성친구와 술 마시는 걸 이해 못 하는 애인과 구속받기 싫어하는 나의 성향 차이로 빚어진 흔하고 평범한 다툼이었다. 서로의 의견 차이가 잘 좁혀지지 않았지만 싸우는 방식은 꽤 신사적이었다. 애인은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은 사람이고 나 역시 애인에게 상처 주면서까지 남사친과의 술자리를 사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사협정 틀 안에서 심한 감정싸움으 번지지 않던 다툼이었건만.. 애인은 기어이 한 마디를 보태고야 만다. "그냥 네가 알아서 해!"


억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알아서 해..? 지금 나한테 선 긋는 거야? 알아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굳이 알아서 안 하는 게 애인사이 아니야? 그러니까 구속받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내가 당신한테 이런 걸 허락받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알아서 하라니?? 알아서 하라니!!! 애인의 한 마디에는 100페이지로 풀어써도 모자랄 뉘앙스가 숨겨진 듯했고 순간 나는 만감이 교차하다가 끝내 서러워졌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100페이지짜리의 뉘앙스를 고독하게 해석하고 있는데 그 사이 반짝하고 엄마라는 이름이 스친다.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것이. 맞다. 나도 엄마한테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 달고 사는데.


이건 늘 "엄마 쫌!" 뒤에 신경질적으로 딸려 나오는 말이었다. 운전하는 곁에서 훈수를 둘 때부터 시작해 운전보다는 더 복잡한 인생의 숙제에 관해 잔소리할 때까지. 상황은 매번 달랐지만 맥락은 엇비슷했다. 엄마가 내 인생에 조금이라도 발을 디디려고 할 때마다 톡 쏘듯 튀어나오는 말이었다.


마침 며칠 전 언니와 이 말을 주제로 대화한 적이 있다. 서로 엄마랑 있었던 일을 털어놓다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린 둘 다 각자의 엄마에게 "내가 알아서 할게!"란 말을 습관처럼 하고 있었다. 언니도 나도 이 말이 엄마에게 큰 상처가 될 거라는 데에 공감했다. 내가 알아서 한다는 말만큼 관계에 선을 긋는 말 없지, 내 인생에 간섭할 자격을 박탈해 버리는 말이잖아. 그걸 인정하면서도 나는 구태여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엄마한테는 자꾸 그렇게 말하게 돼. 어쩔 수가 없어."


원래부터 “내가 알아서 할게!”를 달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그게 당연한 관계라는 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모르지 않다. 사실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랑이란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싸움이고 난 내가 엄마의 약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다 알면서도 나쁘게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 거였다. 모호한 이유에 부족한 진심을 숨겨가면서.


애인과는 잘 화해했다. 말에 뉘앙스를 숨기는 법 없는 애인은 정말로.. 말 그대로.. 네가 알아서 하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가 알아서 한 결과가 남사친과 단둘이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는 거라고 해도, 싫지만 어쩌겠냐는 거였다. 우리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리고 누 한 명 뜻을 굽혀야 한다면 자기가 싫은 마음을 감내하겠다면서. 100페이지짜리 뉘앙스란 내 오해 이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정말이지 단순하고 명료한 사과였다. 지난 사랑의 무수한 싸움에서 내가 늘 듣고 싶어 했던 말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건 엄마 역시 마찬가지일 거였다. 이 사람이 구사하는 정확한 사랑의 말을 언젠가 닮을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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