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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Oct 16. 2023

더 이상 대화가 안 통한다고 판단한다..

애인끼리는 사랑하는 법만큼이나 싸우는 방식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누가 그랬다. 갈등 없는 세상이 불가능하듯 싸우지 않는 연인 역시 건강하지 못한 관계, 그러니 잘 싸워야만 한다고 걔는 말했었다. 생각해 보면 제대로 싸우는 법을 몰랐던 시절에는 마음의 크기에 따라 갑질하거나 갑질당하면서 그걸 싸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겨 뜻을 밀어붙이는 데만 관심 있으면서 교묘한 말로 진심을 숨긴 채 평등하게 다투는 척했다. 잘 싸우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기나긴 연애의 연대기 가운데서도 저울이 기울지 않은 관계는 극히 드물었고 결과적으로는 잘 싸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늘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던 것 같다.


최근 애인과 자주 다투게 되면서 이런 고민이 늘었다. 며칠 전에도 우리는 싸웠다. 이번엔 술이 문제였다.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과 술꾼인 사람이 연인으로 만나면 으레 일어날 법한 싸움이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말다툼이 계속되다 감정이 격해져 "너한테 실망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애인이 먼저 사과하며 상황은 정리됐지만 좁디좁은 내 속에는 기어이 앙금이 쌓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몸집을 불렸다. 아니 근데.. 이렇게 말하는데 날 사랑하는 게 맞다고?


아니 근데


애인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날도 나는 여전히 삐져있었다. 더 이상 이 문제로 대화하지 말자고 좋게 말하길래 티는 안 냈다. 하지만 마음은 아슬아슬했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을 알리 없는 그는 태평하게 운전하면서 어제 친구와 다툰 걸 이르듯이 얘기했다. "... 더 이상 대화가 안 통한다고 판단해서 그냥 걔한테 먼저 사과했어." 조잘조잘 떠드는 걸 듣던 나는 갑자기 기시감이 들면서 기분이 이상해진다. "잠깐. 나한테 사과한 것도 더 이상 대화가 안 통한다고 판단해서였던 거야..?"


분명 난 삐져있었고 날 두고 '더 이상 대화가 안 통한다' 따위의 판단을 했다니 더 삐질만했지만 이상하게 그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본심을 들켰다는 듯 당황한 표정 때문인지 쓸데없이 비장한 표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터뜨린 웃음은 내내 날 서있던 기분을 누그러뜨리고도 남았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가 우리의 밈이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한 발짝만 더 나가면 서로 기분이 상할 것 같을 때 과장되게 진지한 투로 이 말을 하면 됐다. 작전상 일단 후퇴다. 여기가 우리의 휴전선이다. 우리의 의견 차이는 이 이상 좁혀질 수 없지만 여전히 사랑한다. 일단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우리가 한 대화와 주고받은 싸움과 나눈 사랑의 시간이 압축된 이 한 마디 앞에서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있나 맥이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꼭 웃음이 날듯 말듯한 기분이 든다.


분위기가 여기까지 풀리면 서로의 구린 점은 귀여운 농담거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애인에게 'F가 멋있어 보여서 F라고 우기는 T'라고 놀리고 애인은 브로콜리너마저의 '속 좁은 여학생'을 듣다 말고 "네 얘기네?"라며 깐족거린다. 타격 없이 이런 공격을 주고받을 정도로 우리는 느슨해져 있다. 내일이면 또다시 서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으며 싸워댈지 모르지만, 이 순간의 힘을 믿는 한 우리는 함께일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 날 선 장벽을 무너뜨리는 건 한 송이의 꽃, 한 번의 포옹, 한 마디의 농담 같은 것들이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에 바늘을 톡 하고 찌르듯이. 그리하여 우리 안을 가득 채웠던 미움이나 화 같은 감정들이 볼품없는 소리와 함께 몸 안을 빠져나가듯이. 그리하여 서로를 마주 보면서 한숨 한 번 쉬고 허탈한 미소를 짓듯이. 그 미소가 어느샌가 커다란 웃음으로 변해 울려 퍼지듯이. 실없는 농담과 웃음과 다정한 눈빛 사이로 또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어느 영화의 대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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