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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Oct 23. 2023

언니처럼 말하는 연습

여름이 지나고 날이 쌀쌀해지면 그녀를 위해 주말을 비워둬야 할 때다. 내 생일은 9월 그녀의 생일은 10월이니 서로의 생일을 핑계로 만나 그간 묵혀둔 수다의 향연을 펼쳐야 한다. 재작년 생일 그녀에게서 4년 만에 반가운 연락이 온 후 이 만남은 우리 둘 사이 암묵적인 약속이 됐다. 햄스터를 닮은 내 동생 유빈이 얘기다.


뭐 때문에 유빈이가 나에 대해 그런 환상을 품게 됐는지 모르지만.. 유빈이는 늘 내게 멋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내가... 어디가... 왜.. 싶은데 유빈이 말은 내가 말을 분명하게 끝맺는 게 멋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만난 유빈이는 친한 친구들과 '한시 언니처럼 말하기 게임'을 한다고 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말끝을 흐리며 얼버무리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란다. 늘 이기는 편인 유빈이는 우쭐거리면서 "우리 언니는 그렇게 말 안 하거든!" 한다고 했다. (심지어 그 친구들은 나와 알지도 못하는 사이다.) 도대체 왜... 나를... 내가 뭐라고... 싶지만, 실체와 무관하게 유빈이와 친구들 사이에서 난 말을 분명하게 하는 사람의 대표주자 격이 돼있었다.


내가 얼마나 실없는 말장난을 좋아하는지, 남들을 웃기기 위해 또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맘에도 없는 말을 많이 하는지, 그럴 때 내 모습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유빈이는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걔가 두 손을 꼭 모으고 커다란 눈을 빛낼 땐 약간의 죄책감이 든다. 하지만 유빈이가 아는 내 모습도 반쪽짜리일지언정 나인 건 맞으니까. 게다가 그녀의 주접 앞에선 늘 잇몸을 드러내며 칭찬을 들은 부장님 같은 미소를 짓게 되니까. 그러니까 모른척 넘어가기로 한다.

 

나를 예뻐하는 사람보다 귀여워하는 사람보다 멋있어하는 사람 앞에서 더 긴장하게 된다. 도대체 왜... 나를... 내가 뭐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론 뿌듯해져서 더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진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유빈이가 나를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진짜 멋있다기보다는... 그러면 좋았겠지만... 그보단 늘 누군가의 장점만 쏙쏙 골라 바라보는 그 애의 다정한 눈썰미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난 유빈이처럼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늘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닮고 싶어 한다니 꽤 근사한 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이 다가올 때마다 휴대폰을 자꾸 쳐다보게 되는 이유 또한 이렇게 따뜻한 이 아이의 연락을 내가 늘 기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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