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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Oct 30. 2023

젊은 우리, 나이테는 보이질 않고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선잠에 들었다 자꾸만 깨어난 그런 밤으로 1년 전 오늘을 기억한다. 그날 난 생일을 맞은 친구의 집에 놀러 가 편의점에서 산 와인을 함께 나눠마셨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는다. 그 무렵 우리는 틈만 나면 서로의 집을 들락거리며 좋은 음악을 배경으로 와인을 홀짝였고, 그날도 역시 그 무수한 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틀 전에도 우리는 만났다. 퇴근한 후 이태원의 한 바에서 위스키와 칵테일잔을 부딪혔다. 이틀 뒤에는 이곳에서 축제가 열리리라. 떠들썩한 인파 속에서 술을 마셔본 게 언제더라? 그날 찾았던 바는 조명이 어두컴컴했다. 나란히 앉은 사람들이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그런 공간이었다. 여기도 좋긴 한데.. 좀 지루하지? 우리도 이틀 뒤에 이태원에 올까? 얼마나 멋있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얼마나 재밌게 놀려나. 그 무렵 축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생각을 나도 했다.


깰 때마다 통신사 앱을 눌러 실시간 속보를 확인했다. 모로 누운 내가 잠에서 깨 조용히 기사를 읽고 있으면 친구가 누워있는 뒤쪽에서도 어느새 스마트폰 빛이 새어 나왔다. 걔도 잠들지 못하고 계속해 희망의 단서를 찾는 거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다쳤다고만 했는데 그다음에는 심정지라고 했다. 숫자가 자꾸 늘었고, 사망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왔고 그 후에도 숫자가 계속 늘었고... 구체적인 단어와 숫자로 선명해지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아마 우같은 걸 느을 것이다. 무섭고 슬프고 화나다가 결국에는 무력해지는 기분. 두 개의 파란빛이 덩그러니 밝혀진 방에서 제발 더 죽지 말라고 기도하는 일 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그런 밤으로 1년 전 오늘을 기억한다


Y도 6년 전에는 이태원에 갔다. 함께 알바를 마친 자정, 조커 분장을 한 채 탈의실에서 나오던 걔 얼굴을 기억한다. 붉은 립스틱으로 입꼬리를 쭉 찢어 그린 걔 얼굴을 보면서 난 좀 놀랐다. 테이블에 나를 맥주를 따를 땐 시든 것 같았던 눈이 즐거운 기대감에 들떠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드라진 눈썹 뼈 위 반듯하게 뻗은 이마도 그날따라 더 훤해보였다. 10월 말의 추위에 외투를 안 걸쳤는데도 하나도 안 추워 보이는 게 가장 놀라웠다. 시간당 8000원쯤 주는 15평 가게에 걔와 있을 땐 느껴본 적 없는 활기였다. 걔처럼 잘 놀 체력이 없는 나는 그저 부러워하면서 스물다섯의 그 애가 진짜 젊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나는 혹시 이태원을 가진 않았느냐고 걔한테 제일 먼저 물었다. 비슷한 연락을 딴 사람들과도 주고받는 동안 아까운 사람들을 뒤로하고 안도감을 느꼈다. 죄스러웠다. 이런 일은 왜 반복될까. 이런 일 앞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왜 이다지도 한심할까. "안 갔어. 누나는? 별일 없는 거지?" Y에게도 답장이 왔다. 입꼬리를 길게 그렸던 그날의 걔 얼굴이 절로 떠올렸다. 걔처럼 눈을 반짝이고, 걔처럼 훤한 이마를 하고, 걔처럼 자유롭고 멋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였다. 걔처럼 그저 젊을 뿐인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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