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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Nov 06. 2023

가을, 청주

지난주에는 청주에서 열린 김은희 작가님의 강연에 다녀왔다. 친구가 소식을 알려줘 열흘쯤 전 신청하고도 사실은 가기를 망설인 행사였다. 이 계절이 하필 가을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하늘이 높고 청명해지길래 웅장한 메타세콰이어 길로 유명한 장태산에 단풍놀이를 가고 싶었다. 달갑지 않은 비소식이라도 불쑥 끼어들면 그때 강연에 가겠다고 순서를 정해뒀는데 웬걸, '2023 단풍지도'의 예측과 달리 SNS에 올라온 장태산은 온통 여름의 푸른빛뿐 아닌가. 작가님을 만날 운명인가 보다(?) 생각하며 대전이 아닌 청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직 가을이 먼 장태산과 달리 청주의 거리 곳곳은 온통 붉게 물들어있었다. 강연이 열리는 국립청주박물관은 마침 우암산기슭에 있는 데다 담쟁이나 단풍나무처럼 아름다운 나무들이 길을 따라 뻗어있어 가을을 느끼기에 더 알맞았다.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다. 하늘은 유난히 깊고 푸르렀다. 서늘하고 깨끗한 공기를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마시며 '청명관'이라는 이름의 강당을 향해 걷는데 이곳저곳에서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 주말 이 아름다운 날에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일 거였다. 청명관, 깨끗하고 단정한 이름을 속으로 계속 발음해 보는 동안 모르는 사람들과의 거리가 자꾸만 가까워졌다.


나보다 먼저 뭔가를 해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고등학생 때도 난 틈만 나면 사람들의 성공담을 탐독했었다. 그때 내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읽은 이야기는 대부분 원하는 학교에 간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수능 한 번에 대단히 중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약간 으스대면서 쓴 글들이었다. 난 야심 있되 상상력은 빈곤한 청소년으로서 그게 소위 말하는 '성공'이라는 데 특별한 의문을 품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20대에도 기나긴 백수 신분으로 살며 내가 원하는 모습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늘 목말라했다. 사회인이 되면 궁금한 길이 더 없을 줄 알았는데 직장에 다니는 지금도 나보다 앞서 또 다른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고 있다. 내 앞에 펼쳐진 아득한 길을 더 앞에서 돌아보면 무엇이 보일지 알고 싶다. 어쩌면 사는 내내 먼저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부디 나와 나란히 걷는 사람들, 나의 뒤에서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른 척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작가님이 거기 모인 작가지망생들에게 해준 이야기는 재밌고 유익했다. 시시콜콜한 모든 이야기를 기억할 순 없지만 하나의 사실만은 명확해졌다. 세상엔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만 있을 뿐이라는 것. 사실 그건 청주까지 내려가 강의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거였다. 세상 대부분 일이 그렇듯이 말이다. 사실 모두가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지만 분명한 걸 모호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걱정과 감정들이 눈을 흐리게 할 뿐이다. 그래서 가을을 맞아 나는 다시 쓰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동안 섣부른 걱정이나 두려움 때문에 미뤄뒀던 일들을 차근차근해가기로 했다. 오직 쓰는 사람이 나아갈 뿐이며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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