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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Nov 12. 2023

이 오빠 하나도 안 늙었네..

고3 때 오빠를 안 만났으면 수능 성적표가 좀 달라졌을까?


그때 난 공부를 뒤로하고 남돌 덕질에 미쳐있었다. 그 시절 3학년 1반을 생각하면 좀 신비한 기분이 드는데, 거의 모든 애들이 남돌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시골에 있는 비평준화 고교로서 좋은 대학을 위해 여러 청춘사업을 희생할 각오가 된 애들만 우글거리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학교에 늦바람이라도 분 건지, 쉬는 시간 교실 스크린에 빔프로젝트가 쏘아대는 뮤직비디오와 무대 영상이 끊이질 않게 된 것이다. 졸거나 딴짓하거나 아예 땡땡이쳤던 수업시간과 달리 그 시간만 되면 한마음 한뜻으로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던 모두의 얼굴이 또렷하다. 오빠들의 미모 공격에 정신이 아찔해져도 터져 나오는 환호를 삼키는 것은 교실의 규칙. 이토록 신성한 시간을 방해하는 소란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됐다.


폭력이 일상이었던 나의 모교, 선생님들의 살벌한 감시망도 꺾을 수 없던 우리의 욕망과 열정은 대부분 동방신기 오빠들을 향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그때 오빠들은 자신들의 전성기를 이미 떠나보낸 후였다. 설상가상 2+3으로 멤버들이 쪼개지면서 팬덤도 예전만 하지 못했다. 하지만 산기슭에 처박혀 내내 공부만 하던 3학년 1반 여학생들에게 아이돌의 계보란 동방신기에 멈춰있는 것이어서 우리 눈엔 새로 나온 어떤 보이그룹보다도 오빠들이 제일 멋있게만 보였다. 그중에서도 재중오빠에게 푹 빠진 난 그 정도가 좀 심했던 것 같다. 재중오빠랑 결혼하고 말겠다는 헛된 망상을, 마치 노력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평범한 장래희망처럼 떠벌리고 다녔으니 말이다. 열아홉, 그럴 나이는 지났는데도..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재중오빠는 나의 의식과 무의식 모두에서 놀라운 속도로 지워졌다. 어찌나 흔적 없이 사라지던지 한때 닳도록 본 오빠의 영상을 봐도 아무 감흥이 들지 않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그건 성인이 됐다는 흥분에 들뜬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생에 재중오빠만큼 잘생긴 사람은 없어도 화면 속 재중오빠를 보는 것보다 재밌는 일은 얼마든 넘쳤다. 3학년 1반 교실을 휩쓸었던 그 기이한 열정은 무엇이었을까. 수험 생활의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허상의 감정일까. 억압된 우리들의 욕망과 열정이 그런 식으로 분출됐던 것일까. 잠깐 헛헛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눈앞에 둔 스무 살에겐 허무를 길게 느낄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잊은 줄 알았던 그 이름을 다시 불러볼 기회가 최근 생겼다. 친구와 새로 쓰는 글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걔가 아주 인상 깊게 봤다며 재중오빠의 유튜브 영상을 보내준 것이다. 영상을 틀자마자 나오는 재중오빠의 미모는 놀랍게도 10여 년 전에 비해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나도 모르게 "이 오빠 하나도 안 늙었네..." 중얼거리고는 좀 웃었다. 이건 엄마가 소녀 시절 좋아했던 나훈아, 조용필 아저씨를 TV에서 볼 때마다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도 나이를 먹고 있구나.


재중오빠는 게스트로 출연한 김이나 작사가님에게 "그 나이대에 맞는 청춘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30대의 청춘, 40대의 청춘처럼 그 나이대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는 거였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을 가만 보니 내가 좋아했던 그 시절의 얼굴보다 눈빛은 깊어지고 인상은 유해진 것처럼도 보였다. 이 오빠도 분명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거였다. 새삼스러운 시간의 두께를 느끼면서 어떤 시절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매질이 난무했던 그 교실, 재중오빠의 신부가 될 거라는 헛된 꿈 하나로 버텼던 시간들, 아이들의 등수가 걸려있던 그 복도, 해야 할 공부를 미뤄두고 재중오빠의 영상을 보면서 지새운 밤 같은 것들. 그 교실과 복도와 그 시절에서 우리가 들었던 오빠들의 음악은 단 하나의 숨 쉴 구멍이었단 사실이 또렷해졌다.


먹고 자고 공부한 기억밖에 없는 흑백사진 같은 수험생활에서 오빠들의 음악을 들으며 보낸 시간만큼은 생동감 있는 기억으로 남는다. 피곤과 스트레스로 생기를 잃은 3학년 1반 아이들도 그때만큼은 붉은 뺨을 하고 눈을 반짝이는 소녀로 돌아가곤 했었다. 어쩌면 조용필이나 나훈아 아저씨를 보는 엄마도 오빠들의 음악과 함께 했던 어떤 시절을 추억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 시절은 그때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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