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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Nov 20. 2023

행복한 어린이가 되렴!

집에서 끓인 미역국이 먹고 싶지만 요리해 줄 사람이 없을 때 난 좀 슬프다. 이게 슬프다는 걸 언니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으면서 알았다. 2년 전 언니는 날 집으로 초대해 소고기를 넣고 푹 끓인 미역국과 직접 만든 오징어볶음을 대접해 줬다. 요리 안 하는 자취생으로 산 지 10년이 넘으면 집에서 한 밥이 제일 맛있는 법이고 게다가 언니는 까다로운 입맛만큼이나 요리솜씨가 좋다. 그날은 내 생일도 아니고 언니의 생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지만, 언닌 그런 날조차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려는 사람이었다.


생일초를 불기 전에 꼭 소원을 빌어야 한단 것도 언니에게 배웠다. 언니가 소원을 비는 순간을 난 좋아한다. 내가 부른 생일축하 노래가 끝나고 언니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면 잠깐 시간이 멈추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날 언니는 언니 자신을 위한 소원을 하나 빌고 나를 위한 소원을 하나 빌었다고 했다. 무슨 소원인지 물었더니 내 꿈이 이뤄지길 기도했다고 했다. 신이 정말로 생일을 기념해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면 언니는 그 소원권의 절반을 나를 위해서 쓴 셈이었다. 마음이 넉넉한 사람을 곁에 두면 평생 생일이 두 번인 것과 같다.


언니가 날 위해 빌었다는 소원이란 또한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말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기도하는 말은 늘 단순하고 명료하다. 다시 제 손으로 밥벌이를 시작한 동생은 가장 먼저 조카 대추에게 용돈을 줬다. 그때 동생도 대추를 위해 돈봉투 위에 짧은 편지를 남겼다. "건강하게, 씩씩하게, 행복한 어린이가 되렴!" 막 글을 읽기 시작한 대추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법한 그런 문장이었다.


만약 내가 스스로를 위해 소원을 빈다면 뭘 빌게 될까? 돈을 많이 벌고, 사회에서 널리 인정을 받고, 직업적 성취를 얻고... 일을 많이 하고 싶진 않으니까 늘 요행이 따랐으면 좋겠고... 아마도 이런 너저분한 것들이리라. 하지만 만약 내가 언니를 위해, 조카 대추와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해 소원을 빈다면 나의 말은 조금 더 쉬워질 것이다. "늘 사랑하고 사랑받는 행복한 어린이가/어른이 되렴!" 정도가 되겠다. 정말로 중요한 건 돈이나 명예나 직업적 성공이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생일은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그날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으면서 잠깐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초를 켜고 소원을 빌 때는 내가 아는 가장 다정한 사람을 따라 내가 아닌 주변 사람들을 위해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그저 모두 행복하자고 빌었다. 어떤 생일보다도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기도를 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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