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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Aug 16. 2021

우정의 세계에 초대합니다

밴드 합니다, 친구들과 한 철 함께 보낼 방법을 궁리하며.

팔자에 없던 밴드맨이 되어 한 달에 두세 번씩 합주를 하고 있다. 합주실에서 베이스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으면 늘 반 박자 앞서는 손이 야속하다가도 금세 웃음이 새어 나온다. 취미에는 목표가 없고 따라서 실패랄 것도 없으니까. 잘하면 좋고 못해도 웃길 뿐이다. 나태함과 안일함과 실수 같은 모든 부덕함이 용서받을 수 있는 취미의 세계에서 아주 조금씩 걸음마를 떼고 있다.


친구들과 취미를 공유하는 건 더없이 특별한 일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두껍고 다채로워지는 만큼 우정의 밀도는 더 높아진다. 그동안 우리는 매일같이 카톡을 하고 종종 모여 맛있는 음식과 술을 나눠먹었다. 매년 여름을 함께 보낼 궁리도 하였다. 이제는 함께 모여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새로운 공통의 경험을 쌓고 있다.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밴드를 같이 하는 친구들을 포함해 일곱 명의 여자들이 10여 년을 지지고 볶고 부대끼며 지냈다. 우리가 정확히 언제 어떤 계기로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무리를 이루게 됐는지는 누구도 기억을 못 한다. 옆자리 짝꿍이어서, 나와 성격이 비슷해서, 재밌고 웃긴 애여서, 쟤랑 놀면 멋있어 보이니까… 이 모든 이유, 혹은 무엇도 아닌 이유가 복잡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만남은 우연하고 관계는 뜻하지 않게 이뤄진다.


우연히 우정의 세계에 초대된 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 것인지는 온전히 각자의 몫으로 주어지는 법이다. 우리가 한 데 뭉치게 된 건 서로에 대한 여러 가지 느낌과 판단이 뒤엉킨 얼렁뚱땅한 결과물이었지만,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진실한 우정을 나누며 꽤 근사한 서사를 써왔다. 기쁜 일 슬픈 일 화나는 일을 가장 먼저 알리며 서로가 어설프게 자라는 과정을 지켜봐 왔으니 말이다.


또 다른 친구는 언젠가 내가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아 서운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친구들과 있어도 마음이 자주 딴 데 가있었다. 반쯤 나간 형광등, 텅 빈 냉장고 같은 유년시절의 장면과 가족을 향한 애증이 나의 근원을 이루는 정서였기 때문이다. 온 신경과 감정이 거기에 팔려있는 탓에 수다나 산책, 음식 나눠먹기 같은 우정의 의식은 한가하게 느껴졌다. 그 속에 있으면서 나는 자주 어색함을 느꼈다.


지금의 나는 좀 다르다. 일주일에 한 번 친구들을 만나는 게 낙이고, 늙어서도 얘네랑 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노후가 든든하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믿게 된 건 다 이 여자들 덕분이다. 우울함에 매몰돼 도망치듯 잠수를 타다 돌아와도 늘 그 자리에서 따뜻하게 반겨주곤 했던. 까탈 부리는 나를 기꺼이 품어준 이들과 긴 세월 함께하며, 우정은 특별하지 않다는 바로 그 사실로 특별해지는 세계라는 걸 알게 됐다. 가족처럼 애증과 연민이 깃든 사이도 애인만큼 뜨거운 다이내믹이 있는 사이도 아니지만 바로 그 이유에서 우정은 늘 찾게 되는 산책길과 같은 편안함을 준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열일곱 살처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유치한 장난을 친다.


친구들과 취미를 공유하는 것의 또 다른 좋은 점, 바로 친구들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얘는 이런 음악을 즐겨 듣는구나, 얘는 실수에 이렇게 대처하는구나, 얘는 뭔가에 몰두할 때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이제는 다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낯선 환경 속에서 새롭게 보인다. 함께 부대낀 1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존재라는 것. 그만큼 서로에 대해 또 우리의 관계성에 대해 성실하게 탐구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만들어진 지 1년이 채 안된 밴드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다. 누군가 싫증이 날 수도 있고 취미생활이 감당 안 될 정도로 바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밴드가 끝나도 우리는 또 한 철 함께 보낼 방법을 궁리하며 새로운 추억을 쌓아 올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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