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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Aug 06. 2021

말하기 쓰기를 연습하는 이유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여름의 햇살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여름의 햇살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을까?"


머리 위에서 부드럽게 춤추는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언니가 입을 뗐다. 그날은 언니가 우리 집 앞에서 파는 떡볶이를 먹고 싶다며 불쑥 나를 찾아온 날이었다. 내가 아는 언니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누굴 만나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고 아름다운 날. 신이 나 언니의 손을 잡고 떡볶이 집으로 그리고 내가 주말을 보내곤 하는 카페로 향했다. 마당에서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는 사람들 틈에 우리도 자리를 잡았다.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여름 햇살… 언니의 질문을 가만히 곱씹고 있자니 옆 테이블의 말소리는 아득해지고 나뭇잎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만이 우리 사이에 맴돌았다. 속눈썹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언니의 얼굴에도 투명한 빛이 일렁였다. 언니는 이런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무심코 내뱉는 말로 주변의 모든 소음들은 우주 바깥으로 흩어지게끔 만드는 사람.


"모르겠어. 하지만 누군가 분명 이름을 붙였을 것 같아."


그럴싸한 단어들을 머릿속으로 훑어보다가 대답했다. 우리 조상들은 해와 달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에 ‘윤슬’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아름다운 것들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는 나뭇잎에는 이름을 안 붙였을까 싶었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단서가 될 만한 말들을 모조리 조합해가며 자판을 두들겼다. ‘나뭇잎’, ‘녹음’, ‘햇살’, ‘햇빛’… 검색 실력이 꽤 쓸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어떤 답도 손에 쥘 수 없었다. 우리가 찾는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였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름다움이 없던 게 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살다 보면 이런 것들이 있다.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여름의 햇살과 같은 것들. 엄연히 존재하나 설명할 말을 찾기 어려운 아름다움들. 한강을 건너는 지하철에 저녁노을이 스며드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과 거기에 맺히는 황금빛. 빗소리를 배경 삼아 듣는 음악의 특별한 파장. 비가 갠 뒤 대지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모두가 하교한 학교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공 차는 소리. 이런 것들이 왜 그토록 아름다운지 언어에 담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 곤란한 건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이에게 소개해야 할 때다. 네 친구는 어떤 사람이야? 누군가 이렇게 물어올 때만큼 내가 가진 언어의 빈곤함을 절감하게 되는 때도 없다. 언젠가 나는 언니가 얼마나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인지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려다가 그만 좌절했다. 어떤 말을 갖다 붙여봐도 언니의 풍부한 표정을 담아낼 수 없이 납작하게만 느껴졌다. 언니가 몇 살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이런 객관적인 사실이 언니에 대해 말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언니가 가진 습관이나 취향, 취미조차도 언니의 사랑스러움을 설명해내기엔 부족하기만 하다.


내 글의 최초의 독자이자 나와 글쓰기 모임을 하는 친구들에 대해 묻더라도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할 게 뻔하다. 14년 지기 친구인 김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소녀다움을 간직한 사람이다. 4년 지기 친구인 박은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인생의 기쁨에 대해 탐구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무슨 말이든 진심으로 들어주고 따뜻한 응원을 건넬 줄 아는 보기 드문 미덕을 지녔다. 그래서 함께하는 매 순간 감동을 준다. 하지만 이런 말도 내가 두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의 주변부를 맴돌기만 한다. 좋아하는 것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말하기란 늘 어려운 숙제다.


국어 공동체와  개인의 어휘력이   풍부해지더라도 아름다운 것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만족스럽게 표현해내기란 불가능할 만 같다. 그건 영원히 실패로만 남을 것이다. 그럴수록 말과 글을 끝없이 벼려내야만 한다. 희미한 인상으로만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정말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반짝임의 부근에 가닿기 위해서. 그럴 때에만 정확한 사랑의 가능성이 반쯤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말하기와 쓰기를 연습하는  하나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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