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시 Dec 03. 2023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이어질 거예요!

애인에게 할머니를 소개해드렸다. 아빠의 작은 엄마인, 내 작은 할머니를.


아빠는 초등학생 때 아버지를 잃었고 성인이 돼 연애할 무렵에는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태어나보니 내겐 조부모님이 안 계셨던 건데, 그 자리를 대신해 준 분들이 작은 할머니와 작은 할아버지셨다. 하지만 앞에 '작은'이란 말이 붙는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보단 멀게 느껴졌다. 작은 할머니에게는 '진짜' 손녀도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장성한 손주를 여직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거나, 너무 말랐다며 상다리가 휘어지게 밥상을 차려준다는 K 그랜마 에피소드는 나랑 별로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애인은 이번 방송을 위해 시골에 사는 어르신들을 인터뷰해야 했다. 서울 토박이인 그에겐 시골 할머니가 없었고 마감에 시달리는 그를 보다 못한 내가 작은 할머니를 소개해드리기로 한 거였다. 연락을 드리는 마음이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시골에서 보낸 마지막 명절이 이미 오래전이었다. 모처럼 연락이 뭔가를 부탁드리려는 용건이라니. 이런 잠깐의 망설임이 무색하게도 작은 할머니는 내 연락을 아주 반갑게 받아주셨다. "뭘 인터뷰 같은 걸 혀"라고 하면서도 "네 부탁이면 해야지"라고 하시면서.


며칠 뒤 작은 할머닐 뵈러 시골로 출발하며 애인은 약간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따지고 보면 처음으로 내 가족을 소개받는 날이니 그럴 만도 했다. 시골에 도착해서는 작은 할머니와 나눈 대화를 틈틈이 중계해 줬다. 작은 할머니의 첫인사말은 우리 손녀 친구라더니 왜 남자냐는 거랬다. 애인이 흉내 내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충청도 사투리에 작은 할머니의 얼굴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늘 뒷짐 지고 슬렁슬렁 걷던 작은 할머니,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 섞인 말을 툭툭 던지던 작은 할머니.


작은 할머니는 친구라던 남자가 사실은 내 애인이란 걸 눈치챘는지 그에게 내 어릴 적 얘기도 조금 들려주셨다. 어릴 적 할머니 댁에 온 내가 항상 조용히 냉장고에 가서 뭘 꺼내먹었다는 거였다. 다른 애들은 다 안 그랬는데 나 혼자 그랬다면서, 할머니는 내가 상약하다고 하셨댔다. 상약하다.. 그게 뭐지? 나의 약아빠짐을 간파하셨던 걸까? 작은 할머니의 사투리를 알아들을 법한 아빠에게 물어봤지만 아빠마저 아마도 똑 부러진다는 뜻일 거라고 추측했다. 약아빠졌다는 말보다는 똑 부러진다는 말이 더 나으니까 난 그렇게 믿기로 했다.


사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작은 할머니 댁 냉장고에서 혼자 조용히 뭔가를 꺼내먹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작은 할머닌 내가 뭘 꺼내먹든 그저 귀여운 눈으로 봐주셨을 거란 것이다. 뭘 더 주지 못해서 아쉬워하셨을 거란 것이다. 작은 할머니의 할머니가 작은 할머니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죄송한 마음도 약간 들었다. 그 시절 귀한 줄도 모르고 받았던 마음들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으리라.


시골에서 돌아온 애인은 할머니가 주라고 하셨다면서 내게 밤이 한가득 든 검은 봉지를 건넸다. 당신은 이렇게 밤을 주워 삼촌을 먹이고 아빠를 먹이고 그리고 나를 먹이셨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사랑이 투박하게 담겨있는 봉지인 셈이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는 그 마을에서 허리 숙여 밤을 주웠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괜스레 코가 뜨거워졌다.

작가의 이전글 사주가 전지현이네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