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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Dec 10. 2023

겨울, 조카, 썰매

우리 집 냉장고에는 조카 대추의 사진과 함께 그 애가 날 위해 써준 한 통의 편지가 붙어있다. 올해 생일 그 애가 가져다준 깜짝 선물로, A4 용지 삐뚤빼뚤하게 적힌 메시지는 짧고 간단다. "이모 생일 축하해. 그리고 사랑해. (그리고 깜찍한 하트..)"


이 편지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볼 수 있도록 내 눈높이에 꼭 맞는 위치에 붙어있다. 조카를 닮은 귀여운 토끼 모양 마그네틱으로 말이다. 요리를 하지 않아 냉장고 문을 열 일이 없으니 대신 화장품을 넣어놨다. 세수하고 스킨을 바를 때마다 이 편지를 읽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 결과 난 아침저녁 하루에 두 번씩 조카의 편지를 읽으면서 왈칵하는 사람이 됐다. 고객센터에만 전화해도 들을 수 있는 닳아빠진 말이, 대추의 글씨체로 쓰였단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말이 되다니. 아이들의 말엔 어른들의 것보다 몇 배나 강한 힘이 있단 걸 냉장고 앞에서 매번 깨닫는다.


대추 역시 닳아빠진 어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유일무이한 말로 기억하곤 한다. 언젠가 조카를 만나기 위해 고향에 갔을 때 그 앤 동네 고양이를 보러 가자며 내 손을 끌어 집을 나섰다. 실컷 고양이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눈을 동그랗게 하고 날 올려다보면서 입을 옴싹달싹했다. 뭔가 할 말이 있단 뜻이었다.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니 걘 세상에 둘도 없는 비밀이라는 듯이 조용조용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모, 나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데..”


말끝을 흐려서 말하는 이 애의 습관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엄마가 하지 말라는 일을 하고 싶을 때 대추는 늘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엄마가 일찍 들어오라고 했는데, 자기는 지금 놀이터에 가서 늦게까지 놀고 싶은데, 자기 입으로 그러자고 할 수 없으니 이모가 대신 나서달란 의미였다. 웃음을 참고선 차분하게 아이를 설득했다. 엄마가 금방 돌아오라고 했으니 이만 돌아가자고, 이모도 곧 집에 가봐야 한다고. 그러자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모가 다음에 같이 놀자고 했잖아.”


젠가 지나가는 말로 대추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별 뜻도 없이 말이다. 아마 휴대폰을 보는 중이었겠지. 언니랑 이야기를 하던 중이거나 운전하던 중일 수도 있다. 대추와 눈을 맞추면서 한 말일 수도, 매일같이 영상통화를 하면서 습관처럼 한 말일 수도 있다. 무슨 상황에서 뱉은 말이었건 그게 대추에겐 기약 있는 약속이 된 거였다.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한 말을 지키는 건 당연한 건데. 아이와 대화하면 이렇듯 잊고 있던 당연한 것들을 새롭게 깨닫게도 된다.


그래서 조카와 대화할 땐 한 가지 원칙을 따르기로 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는 것. 이 사수하겠다고 지난겨울에는 시내의 문방구를 다 뒤지는 소동도 벌였다. 대추네 동네에 눈이 아주 많이 온 날이었다. 신이 난 아이를 데리고 같이 눈사람을 만들러 갔는데, 거기 모인 동네 애들 손에 하나같이 썰매가 들려 있었다. 대추는 썰매에 정신이 팔려 눈사람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굴러다니는 박스를 주워 썰매를 몇 번 타고는 내일 꼭 썰매를 사다 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런 약속을 안 할 수도 있었는데.. 아이의 그렁그렁한 눈앞에서는 기어이 이런 약속을 하게 된다.


그때 썰매를 타고 싶어 한 아이가 대추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절망적이게도 청주 시내 그 어디에서도 썰매를 찾을 수 없었다. 썰매 품절 대란이 일어난 거였다. 거짓말쟁이 이모가 될 수 없다는 생각 하나로 그때부터 시내의 모든 문구점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문구점부터 저 멀리 외곽에 있는 문구점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전화를 하고 하고 또 하고... "썰매 파나요? 뽀로로 썰매요.." 절박함이 통건지 열 군데 넘게 전화를 돌린 끝에 썰매가 있다는 문구점을 찾을 수 있었다. 곧바로 눈길을 뚫고 차를 운전해 갔다. 대추가 갖고 싶어 하는 뽀로로 썰매는 아니지만 다른 이 없었다. 그렇다고 밋밋한 플라스틱 썰매만 덜렁 들고 가기는 민망해 거기 붙일 뽀로로 스티커 잔뜩 사서 갔다.


다행히 마음 넓은 대추는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인 그 썰매를 '뽀로로 썰매'로 선뜻 인정해줬다. 너랑 한 말을 지키려 청주의 문구점을 다 뒤진 이모의 마음을 아니? 아이의 썰매를 밀어주고 끌어주고 녹초가 된 채 집에 돌아오는 길, 하얗게 웃는 대추의 얼굴을 보며 사랑이 뭔지 드디어 깨달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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