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냉장고에는 조카 대추의 사진과 함께 그 애가 날 위해 써준 한 통의 편지가 붙어있다. 올해 생일 그 애가 가져다준 깜짝 선물로, A4 용지에 삐뚤빼뚤하게 적힌 메시지는 짧고 간단하다. "이모 생일 축하해. 그리고 사랑해. (그리고 깜찍한 하트..)"
이 편지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볼 수 있도록 내 눈높이에 꼭 맞는 위치에 붙어있다. 조카를 닮은 귀여운 토끼 모양 마그네틱으로 말이다. 요리를 하지 않아 냉장고 문을 열 일이 없으니 대신 화장품을 넣어놨다. 세수하고 스킨을 바를 때마다 이 편지를 읽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 결과 난 아침저녁 하루에 두 번씩 조카의 편지를 읽으면서 왈칵하는 사람이 됐다. 고객센터에만 전화해도 들을 수 있는 닳아빠진 말이, 대추의 글씨체로 쓰였단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말이 되다니. 아이들의 말엔 어른들의 것보다 몇 배나 강한 힘이 있단 걸 냉장고 앞에서 매번 깨닫는다.
대추 역시 닳아빠진 어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유일무이한 말로 기억하곤 한다. 언젠가 조카를 만나기 위해 고향에 갔을 때 그 앤 동네 고양이를 보러 가자며 내 손을 끌어 집을 나섰다. 실컷 고양이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눈을 동그랗게 하고 날 올려다보면서 입을 옴싹달싹했다. 뭔가 할 말이 있단 뜻이었다.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니 걘 세상에 둘도 없는 비밀이라는 듯이 조용조용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모, 나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데..”
말끝을 흐려서 말하는 이 애의 습관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엄마가 하지 말라는 일을 하고 싶을 때 대추는 늘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엄마가 일찍 들어오라고 했는데, 자기는 지금 놀이터에 가서 늦게까지 놀고 싶은데, 자기 입으로 그러자고 할 수 없으니 이모가 대신 나서달란 의미였다. 웃음을 참고선 차분하게 아이를 설득했다. 엄마가 금방 돌아오라고 했으니 이만 돌아가자고, 이모도 곧 집에 가봐야 한다고. 그러자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모가 다음에 같이 놀자고 했잖아.”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대추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별 뜻도 없이 말이다. 아마 휴대폰을 보는 중이었겠지. 언니랑 이야기를 하던 중이거나 운전하던 중일 수도 있다. 대추와 눈을 맞추면서 한 말일 수도, 매일같이 영상통화를 하면서 습관처럼 한 말일 수도 있다. 무슨 상황에서 뱉은 말이었건 그게 대추에겐 기약 있는 약속이 된 거였다.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한 말을 지키는 건 당연한 건데. 아이와 대화하면 이렇듯 잊고 있던 당연한 것들을 새롭게 깨닫게도 된다.
그래서 조카와 대화할 땐 한 가지 원칙을 따르기로 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는 것. 이걸 사수하겠다고 지난겨울에는 시내의 문방구를 다 뒤지는 소동도 벌였다. 대추네 동네에 눈이 아주 많이 온 날이었다. 신이 난 아이를 데리고 같이 눈사람을 만들러 갔는데, 거기 모인 동네 애들 손에 하나같이 썰매가 들려 있었다. 대추는 썰매에 정신이 팔려 눈사람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굴러다니는 박스를 주워 썰매를 몇 번 타고는 내일 꼭 썰매를 사다 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런 약속을 안 할 수도 있었는데.. 아이의 그렁그렁한 눈앞에서는 기어이 이런 약속을 하게 된다.
그때 썰매를 타고 싶어 한 아이가 대추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절망적이게도 청주 시내 그 어디에서도 썰매를 찾을 수 없었다. 썰매 품절 대란이 일어난 거였다. 거짓말쟁이 이모가 될 수 없다는 생각 하나로 그때부터 시내의 모든 문구점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문구점부터 저 멀리 외곽에 있는 문구점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전화를 하고 하고 또 하고... "썰매 파나요? 뽀로로 썰매요.." 절박함이 통한 건지 열 군데 넘게 전화를 돌린 끝에 썰매가 있다는 문구점을 찾을 수 있었다. 곧바로 눈길을 뚫고 차를 운전해 갔다. 대추가 갖고 싶어 하는 뽀로로 썰매는 아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렇다고 밋밋한 플라스틱 썰매만 덜렁 들고 가기는 민망해 거기 붙일 뽀로로 스티커도 잔뜩 사서 갔다.
다행히 마음 넓은 대추는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인 그 썰매를 '뽀로로 썰매'로 선뜻 인정해줬다. 너랑 한 말을 지키려 청주의 문구점을 다 뒤진 이모의 마음을 아니? 아이의 썰매를 밀어주고 끌어주고 녹초가 된 채 집에 돌아오는 길, 하얗게 웃는 대추의 얼굴을 보며 사랑이 뭔지 드디어 깨달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