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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Dec 18. 2023

감기, 삿포로

휴가를 내고 나흘간 삿포로에 다녀왔다. 


전날 밤부터 감기 기운이 올라 목이 갈라지고 오한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는 여행을 취소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대신 병원으로 달려가 주사를 놔달라고 했다. 서울의 날씨는 철을 모르고 푹했다. 그 바람조차 에는 듯이 아팠다. 자꾸 움츠러드는 가슴을 펴고 부러 씩씩하게 걸었다. 손에는 약이 넉넉하게 든 뚱뚱한 봉투를 든 채로. 삿포로에 가야 해! 나를 힘들게 한 팀장도 끝없는 업무도 지겨운 이 도시도 없는 그곳으로!


삿포로의 겨울은 걱정만큼 춥지는 않았다. 

그것이 여행에 취한 내 몸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것임을 얼마 안 가 깨달았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진 삿포로의 밤거리를 산책하고 오래 줄을 서 칭기즈칸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안 나던 열이 올랐기 때문이다. 빨리 나으려고 그 맛있다는 나마 비루(생맥주)도 안 마셨는데... 억울했다. 집에 있을 걸. 귀중한 휴가가 '겨울휴가 절망 편'으로 남을 위기였다.


남은 날동안 그날 밤보다 아픈 적은 다행히 없었다. 대신 오한 + 코를 훌쩍이느라 지끈한 머리 + 약 기운에 쏟아지는 졸음이 쓰리 콤보로 겹쳐 내내 현실 감각이 조금 떨어진 채 다녔다. 의외로 그건 나쁘지만은 않았다. <윤희에게>의 배경인 오타루를 향해 바닷가를 따라 난 기찻길을 달릴 땐 마치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1912년에 지어졌다는 오르골당의 기름칠한 바닥을 삐걱이며 걸을 땐 100여 년 전으로 시간여행하는 듯했다. 거기에 울려 퍼지는 오르골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오타루의 카페 '기타이치홀'에 들어가는 순간엔 공간의 힘을 실감하기도 했다. 카페이기 전엔 석조창고였던 그 공간엔 햇빛이 한 줌도 들어오지 않았다. 바깥은 눈발이 흩날리는 환한 대낮인데도 내부는 은은한 조명으로 간신히 밝힌 어둠 속이었다. 석유등이 타며 기름 냄새를 풍기기까지 해 이곳의 시간이 한참 앞으로 당겨졌다. 순식간에 새로운 세계로 와버린 것 같았다. 정장을 차려입은 종업원들이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받아 비밀스러운 인상까지도 줬다. 달지 않은 홍차를 시키고는 구석 자리에서 앉아 시간 맞춰 시작된 피아노 공연을 들었다. 아주 오래 그리워한 장면을 꿈에서 보는 듯했다.


홋카이도의 시골 마을인 비에이를 여행할 때도 꿈을 꾸는 기분은 내내 마찬가지였다. 거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설국이었다. 창백하게 내리는 눈과 채도가 낮은 하늘이 세상을 파란 필름 끼운 듯 보이게끔 했다. 거기선 참지 못하고 나마 비루를 마셨다.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면 이런 기분일까? 술기운이 약간 오른 채 함박눈이 쏟아지는 이국의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이 낯선 거리도, 낯선 풍경도, 감기와 약과 술이 만들어낸 낯선 기분도 모두 다 빠짐없이 그대로.


아픈 몸을 이끌고 나름 강행군을 소화했는데도 큰 탈 없이 여행을 마칠 수 있었던 게 신기하다. 두둑하게 지어온 약을 다 먹기도 전 맥주를 마셔댔는데도 말이지... 감사한 일이다. 아파 몽롱한 감각이 그 도시를 더 신비한 곳으로 만들었기에 더욱더. 어쩌면 이 모든 건 감기나 약 때문이 아니라, 맥주 때문도 아니라, 한결같은 따뜻함으로 손을 데워주던 옆 사람 때문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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