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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Dec 24. 2023

내가 또 술 마시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왈오ㅏㄹ..왈!!!!!!!!

좆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번쩍 떴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마룻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내복 차림의 몸뚱이가 들어왔다. 활짝 열린 방문으로, 거실로, 현관으로 천천히 시야를 옮기니 헨젤과 그레텔처럼 지나온 길을 표시한 흔적이 보였다. 과자가 아닌 어제 입은 옷가지들이...


신발장 앞에 던져놓은 가방에선 먹다 남은 딸기가 나왔다. ‘보냉백은 비닐류에 버려요’... 이게 왜.... 그다음 벗어던졌을 패딩 주머니에선 꾸깃꾸깃한 인생 네 컷이 나왔다. 이건 또 언제 찍었냐... 공포심이 커지고 있는데 사라진 기억의 틈새로 구토를 한 장면이 짧게 스친다. 좆됐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근데 진짜.. 진짜 좆됐다. 아무리 찾아도 핸드폰이 보이질 않는다.


연말을 맞아 쉴 틈 없이 달린 한 주. 또 한 번 술주정의 역사를 새로 썼다. 원래도 술 마시면 토하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이번엔 플러스 알파로 눈길에 넘어져 다리에 피멍이 들었다. 그러다가 패딩과 바지를 찢어먹었다. 처음으로 핸드폰도 잃어버려봤다. 다음 날 아침, 핸드폰도 없이 요동치는 속을 안고 출근하며 비로소 어른이 됐다고 느꼈고 회사 선배들에게 폰을 잃어버렸다 말하면서는 다시 아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선배들이 말끝마다 붙이는 ‘ㅎㅎ’, ‘ㅋㅋ’에서 어떤 행간이 읽혔기 때문이다. ‘너 아직도 그러고 사냐...’


어쩌다 절제를 모르는 어른으로 컸을까. 이렇게 반성하는 척하지만 사실 진정 뉘우치지 않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술 마시는 거 재밌으니까!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술 마시면 두 배로 재밌으니까! 젊을 때 맘껏 못 놀고 알바만 죽어라 해서 내가 이렇게 된 거야! 이제 난 재밌게 살 거야! 누굴 향한 항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내 진심이라는 걸 더 이상 부인할 수가 없다. 정말이지.. 술 취한 사람들이 오직 재미를 위해 아무 의미 없는 기표만 떠드는 게 너무 좋다. (술 마시면 텐션 업되는 타입) 알코올의 기운을 빌렸을지언정 맹목적인 웃음만이 가득한 테이블 위의 분위기가 좋다. 이 테이블 바깥에는 우리가 견뎌내기 어려운 무거운 일들이 많으니까. 그러니 술과 음식 냄새가 풍기는 테이블의 따뜻함과 유쾌함이 좋다. 더없이 좋다. 그런데...


핸드폰은 동네 길바닥에서 찾았다. 구글의 첨단 위치 정보 기술의 도움을 받았다. 길 위에 보란 듯이 놓인 핸드폰을 가져가지 않은 이웃들의 선의 덕도 봤다. 넘어져 더러워진 패딩을 세탁소에 맡기고 코트 차림으로 영하 15도의 길바닥을 돌아다녔다. 내 행색이 딱하다며 애인은 로켓배송으로 패딩을 선물해 줬다. 1년 전의 나였으면 '이렇게 술 취해서 다녀도 결국 별일 없구나! 으하하!' 했을 텐데... 올해는 좀 다르다. 넘어져 다치고 핸드폰까지 잃어버린 이상 이 즐거움이 과연 지속가능한 걸까? 안 되겠다. 내년 새해 목표는 금주다. 내가 또 술 마시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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