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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Jan 01. 2024

새해엔 불꽃놀이를 하자!

2023년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청주에 내려와 동생의 장 보는 길을 쭐래쭐래 쫓아다녔다. 엄마의 가게에 들러 일을 돕는 둥 마는 둥 했고 집에 가선 가족들과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12월 31일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메뉴, 김치찜이었다. 집에만 오면 왜 이렇게 식욕이 왕성해지는 걸까. 밥 한 공기를 비우고도 약간 허전한 기분이 들어 냉장고에 있던 요거트와 과일을 털어 먹고 배스킨라빈스까지 배달시켜서 먹었다.


평소보다 더 돼지런했다는 점만 빼면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TV에서 시상식이나 가요대제전을 틀어주지 않았다면 연말이라는 걸 까맣게 몰랐을지도 모른다. 뻔하지만 그래서 12월 31일이란 걸 알게 해주는 무대들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고는 1년 전, 2년 전 오늘엔 무얼 했는지 순서대로 떠올려봤다. 어떤 연말에는 야근하면서 건조한 표정으로 보냈고 어떤 연말에는 가족이나 친구와 케이크에 초를 켜고선 보냈던 게 떠올랐다.


흐릿한 기억 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사람이 북적이는 보신각 같은 곳에서 보낸 장면은 잘 안 보였다. 그런 번화가에서 새해를 맞은 건 성인을 앞둔 19살의 연말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무적의 여고생이었던 난 지금은 절대 입지 않는 짧은 치마를 두르고 역시나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신을까 말까 한 높은 구두를 신은 채 청주 시내에 나가있었다. 날이 너무 추워 두껍고 촌스러운 화장 위로 코와 볼이 빨갛게 얼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날의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을 들여 나를 단장했고 추위와 인파를 뚫고 굳이 굳이 시내에 나가는 정성을 들여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십대를 보내고 스무 살이 되는 날은 아무래도 좀 특별하니까. 서른 살이 되는 1월 1일 역시 기억에 남는 하루였다. 친구들과 함께 만두를 빚으며 종소리를 들었던, 따듯하고 둥근 밤으로 그날을 기억한다. 뉴욕 타임스퀘어 앞에서 서른 살을 맞겠다는 오랜 꿈은 코로나 때문에 이루지 못했지만. 역시 타임스퀘어보단 손만두니까...


옆에 아빠가 코 골며 자고 있는 거실에서 하루종일 씻지도 않은 누추한 모습으로 타종 소리를 듣는 게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새해만이 특별한 날은 아닌데. 좀 춥고 귀찮아도 보신각에 갈 걸 그랬나? 아니면 친구나 애인과 함께 초라도 켤 걸 그랬나? 어떤 특별한 행사도 의식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니까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날들이 반복되는 게 아닐까?


엄마 가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둑방길에서 불꽃놀이를 하던 사람들을 봤다. 가까이 다가가니 얼굴이 앳되고 귀여운 차림을 한 게 틀림없는 학생들 같았다. 삐이익- 팡! 단출한 소리를 내며 조그맣게 터지는 불꽃을 지켜보면서 조수석에 탄 동생과 이런 얘기를 했다. 이런 날을 불꽃놀이까지 하면서 기념하는 건 곧 스무 살이 되는 애들뿐일 거라고. 그 애들이 터뜨리는 황금빛은 안타까울 만큼 빠르게 흩어져 사라졌지만 걔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을 기억하는 한 그 애들의 한 해는 영원히 찬란하게 빛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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