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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Jan 08. 2024

다시, 인스타그램

팔로워 100명이 안 되는 인스타그래머이지만 게시물은 100만 인플루언서 못지않게 관리한다. 다시 보니 표정이 못나거나 지나치게 예쁜척한 거, 풍경의 구도가 영 촌스러워 보이는 걸 골라 내게만 보이게 감추는 것이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밑에 적은 문장도 엄격하게 살핀다. 뚝뚝 흐르는 감성이 영 못 견디겠는 게시물에 대해선 특히 가차 없는데, 난 글을 쓰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하므로 이 빈도는 열에 아홉이다. 보관함에 차곡차곡 쌓이는 게시물을 보면서 가끔 생각한다. 휴.. 유명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게시물이 박제될 걱정쯤 안 해도 되니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면 좀 안 쿨해 보인다. 넘치는 말을 안 멋진 문장에 담으면 더 그렇다. 정성스럽게 쓴 게시물이 보관함에 처박히는 게 아까워서 지난해 여름에는 계정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게시물을 달에 하나씩 올려 육하원칙에 따라 있었던 일만 기록하기로 정한 거였다. 이른바 <월말 결산>. 예상 가능하게도 세 달을 못 갔다. 일단 난 강제성 없는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건조한 사실관계를 적는 게 재밌지도 않다. 이달의 감상을 짧고 압축적이게라도 덧붙이고 싶어 근질근질했고 결국 그렇게 됐다. 이걸 지워 말아.. 또 고민하다가 아예 기록을 포기했다.


나는 자주 내가 별로다. 지나치게 산만하고 (특히 술을) 절제하는 법을 잘 모른다. 자주 흥분한다. 그래서 진지하게 말하는 법이 없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가장 별로인 건 나의 별로인 점을 인정하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안 그런다는 점이다. 차분해 보이고 싶어! 쿨해 보이고 싶어! 과거의 나는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 거야! 차분하고 쿨하려는 생각은 별로 없으면서, 과거를 편집하고 지워 그렇게 보이고만 싶다. 


그러다 지쳐 인스타그램을 안 한지 언 5개월.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굴 만났고, 어딜 갔고, 무얼 했는지부터 뭘 느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까지. 여름에 멈춰버린 <월말 결산>을 보면서 지난가을과 겨울이 어떤 계절이었는지 가늠해 보는데 전부 희미했다. 찍어둔 사진을 보면서 육하원칙 사실을 떠올릴 수는 있어도 생각과 감정을 유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현재는 어디로 가는 걸까? 포착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손틈새로 빠져나가버리는 지금은.


결국 새해를 맞아 인스타그램에 다시 <월말 결산>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봐도 부끄럽지 않도록 담백하게.. 하지만 뭐가 됐든 뭘 생각하고 뭘 느끼는지는 꼭 남기기로 했다. 모든 게 없던 일이 돼버리지 않도록 말이다.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지나치게 변화무쌍한 스스로에게 조금만 관대해지기로도 했다. 자주 별로일지언정 그 또한 결국 나고, 그 시차만큼이나 나는 성장했을 것이며, 그게 성장이 아니라 후퇴라 할지라도 너그럽게 웃어넘길 줄도 알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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