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시 Jan 22. 2024

선배

나는 병에 걸렸다. 막내병. 어느덧 7년 차 직장인인데도 스스로 '귀여운 막내'라고 주장하는 병..


난 막내이고 싶다. 지금도 막내이긴 하지만 격렬하게 더 막내이고 싶다. 지금까지 난 후배와 함께 일해본 적이 손에 꼽는다. 처음 같은 팀에 들어온 후배는 연차도 나이도 어리지만 훨씬 의젓한 친구였다. 틈만 나면 카톡 해서 "환아 일하기 싫지 않냐" "퇴근하고 싶다" 따위의 시답잖은 말을 거는 내게, 늘 "ㅋㅋ" "ㅎㅎ"를 붙여 적당히 대꾸할 뿐 우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던. 이후로도 비슷하게 어른스러운 후배를 만나거나 아예 후배가 들어오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귀여워하지 않지만 어쨌든 귀여운 막내의 지위를 아슬아슬하게 지켜온 셈이다. 앞으로도 이런 상태가 쭉 계속됐음 한다.


피터팬 콤플렉스 혹은 유아 퇴행의 한 형태일까. 10년 차가 머지않은 시점에서 막내 타령하는 게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선배들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운이 좋았다. 만나는 선배들마다 능력 면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분들이었다.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웠다. 어른이란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는 걸 가르쳐준 것도 선배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선배들은 나 같은 후배들에게 뭐 하나 아끼는 법이 없었다. 내게 있어 선배란 술을 사달라고 하면 아무리 컨디션이 안 좋아도 술자리에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선배면 몰라도 후배가 술마시자고 하는 건 거절해선 안 된다"는 게 선배들의 철학이었다. 많이 먹지도 못하는 내게 많이 먹으라며 자꾸만 밥을 사주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다 큰 성인인 나를, 어디서 굶고 다니는 게 아닐지 걱정된다는 듯 챙겨주는 게 정말 좋았다. 이건 내가 또래 직장인답지 않게 회식을 기다리곤 했던 이유였다. 선배들이 좋으니까. 좋아하는 사람들이 맛있는 걸 사준다고 하니까!


같은 팀에만 후배가 없을 뿐 조직에서는 어느새 '허리'라고 불리는 연차가 됐다. 내가 선배들에게 받은 걸 그대로 후배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일이 도대체 가능은 할까? 아직 선배들처럼 능력이 출중하지 않은데. 일과 조직이 익숙하지 않은 후배를 기다려주는 법도 잘 모르는데. 무엇보다 컨디션 안 좋을 때 후배 얘기 들어주겠다고 술마시긴 더더욱 싫은데. 선배들이 내게 준 걸 곱씹을수록 도대체 이게 실현이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 아. 어쩌면 난 <선배> 자격이 없는 사람일지도. 당분간은 선배의 자격을 박탈당한 채 막내로 있어야 할 것만 같다.

작가의 이전글 이모! 밥은 먹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