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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Feb 05. 2024

House I used to call Home

안녕, 신수동!

이 집을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4년 전 그날 이 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든 건 안방 창문 너머의 풍경이었다. 환기라도 할 참이면 앞집 이웃과 눈이 마주치던 이전 집과 달리, 이 집은 도로를 향해 나있는 안방 창문 너머로 중학교 운동장이 낮고 넓게 펼쳐져있었다. 그날은 한 겨울이었다. 나무는 앙상하고 운동장엔 뛰어노는 아이도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공도 없는. 그런데도 그 풍경이 하나도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주인 없는 공간의 한기가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데도 햇살을 받아 빛나는 운동장의 모래라던지 아이들의 함성 소리, 푸르른 녹음 같은 걸 상상할 수 있었다.


그날로 이사를 결심해 신수동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았다. 봄볕이 든 동네는 상상한 그대로였다.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평화롭고 활기찼다. 평일 점심시간에는 떼 지어 축구나 피구를 하는 아이들의 명랑한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 집안까지 들어왔다. 수업종이 울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진 공기를 가르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신수동을 신수동답게 만드는 그 모든 소리 중 내가 가장 좋아한 건 공 차는 소리였다. 일요일 아침마다 들리는 그 소리는 형광색 조끼를 맞춰 입은 사회인 축구단 아저씨들의 발끝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들은 몸을 느릿느릿 움직이면서도 공만큼은 아주 정확하게 찼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아스라이 들리는, 뻥- 뻥-. 그걸 들으면서 깜빡깜빡 잠에서 깨던 순간이 좋았다. 그런 아침은 하나도 외롭지 않았고 잔잔한 평화와 약간의 활기 속에서 일요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골목골목 숨겨진 카페나 식당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이 동네엔 있었다. 개성 있고 감각적인 가게들이 이곳엔 많았다. 세상에서 제일 고운 우유스팀을 치는 카페, 직접 기르고 말린 고춧가루로 감칠맛을 내는 떡볶이 집, 비 오는 날이면 빗소리를 듣기 위해 갔던 위스키 바, 매년 작은 축제를 열곤 했던 동네 서점... 아직 개발의 삽이 휩쓸고 지나가지 않아 적당히 사람 냄새가 나는 이 소박한 동네의 온도와 밀도가 내겐 딱 적당했다. 합정 홍대 상수에 이어 이곳에 닥칠지 모를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 시름하던 얼굴들을 떠올리면 언제부턴가 동네 곳곳에 걸리기 시작한 재개발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괜히 미워 보이기도 했다.


오래된 빌라여서 장마철이면 비가 샜고 늘 에프킬라를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살았다. 저렴한 시세가 증명하듯 세간의 눈에도 흠이 많은 이 집이 한 번도 질린 적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형편에 맞는 사람으로서 날 받아준 공간 또한 이 집뿐이었다. 이곳에 파묻혀 난 20대를 마무리했고 서른 살을 맞았다. 누추한 공간을 쓸고 닦으며 정성스럽게 손님을 맞았던, 좁은 방에서 함께 부대끼며 술과 음식을 나눠먹고 영화를 보고 수다를 떨었던 시간들 역시 이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4년. 짧다면 짧은 시간 이렇게나 정이 들어버린 건 아무래도 내 동네가 신수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창밖으로 아이와 어른들이 뛰어놀고 새들이 지저귀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사장님들이 자기만의 개성 있는 가게를 가꿔나가는.


지난 주말에는 모든 짐을 뺀 텅 빈 집을 다음 세입자에게 건넸다. 내 것인 적이 없으므로 '건넸다'는 표현은 참 무색하다. 하지만 4년 동안 이 공간에서 쌓은 추억은 분명 내 것이므로 당분간은 신수동을 내 집, 내 동네로 추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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