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2주 휴가를 얻어 유럽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동안 여행이란 여행은 모두 애인이 계획했고,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던 난 이번 여행의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3개월 전부터 호언장담을 해왔다. 애인에게 미안한 마음은 반쯤. 나머지 절반은 처음 가는 유럽이라 내 취향대로 일정을 짜고 숙소를 고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최선의 선택지로 꽉꽉 채워 최고의 휴가를 보내고 오리라!
하지만 생각보다도 게을렀던 난 휴가가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도 비행기조차 예약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그러는 동안 아무런 시도도 안 했던 건 아니다. 다만 이 비행기와 저 비행기 중 뭐가 더 나을지 고민하다 머리가 아파져 매번 다음으로 미뤘을 뿐이다. 숙소도 마찬가지. 위치가 괜찮아 보이는 숙소는 너무 비쌌고, 그나마 가격대가 합리적인 곳은 관광 동선과 너무 멀어져 오고 가기에 힘들 것 같았다. 조금만 생각해 보고 내일 결정해야지. 그러기를 반복하는 사이 무심한 시간이 한 달, 두 달 빠르게 흘러갔을 뿐이다.
일하면서 여행 계획하는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이 존경스럽다. 그러니까, 그동안 날 데리고 여행해 준 모든 친구들과 지금의 애인. 비행기 티켓을 눈팅하고 있던 J형 인간인 애인은 내가 예약을 미루는 사이 표값이 오르자 보다 못해 비행기를 직접 예약했다. 숙소 또한 괜찮아 보이는 곳들의 리스트를 얼추 추려 그중 선택할 수 있도록 보내줬다. 내가 바쁜 만큼 당신도 바쁠 텐데 언제 그걸 찾아보고 있었는지 미스터리다. "이제 진짜 내가 할게!"를 외치는 내게 애인은 휴가 준비는 틈틈이 해야 한다고, 이제는 일정을 짜야하니 쉬는 때마다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보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알았어. 이제 진짜 내가 할게!"
하지만 비행기 티켓팅과 숙소 예약보다 더 어려운 게 여행의 일정을 짜는 일이었다. '살다가 한번쯤은 또 오겠지...'하고 생각하면 쉬엄쉬엄 둘러봐야지 싶다가도, 올림픽을 앞둔 파리의 높은 물가를 생각하면 뽕을 뽑고 말겠다는 투지가 타오르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일정을 넣었다 뺐다 플랜 A, B, C까지 만들어 하루종일 고민한 결과는 시차에 적응하거나 체력을 회복할 틈을 허용하지 않는, 의욕 넘치는 어린이의 여름방학 계획표 같은 무언가였다. 충동형 100%인 평소의 나라면 숨이 막힐 만한. 왠지 의욕이 사라진다. 휴가 때 그냥 집에서 글이나 쓸걸.
이게 다 이번 여행을 완벽하게 보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다.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싶다가도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건. 팔자에도 없는 빡빡한 스케줄을 만들고 셀프 숨 막혀하는 건. 살다가 한 번쯤 또 오겠지. 못 와도 뭐 어쩔 수 없지. 아침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꽉꽉 짜인 일정표를 물끄러미 보다 결국 '비고'란을 추가하기로 한다. "피곤하면 숙소에서 잠 자기". "힘들면 취소". "안 가도 됨." 붕 뜨는 시간 동안 대안은 없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