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샤를 드골 공항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깨가 뻣뻣해지도록 몸이 굳는 걸 느꼈다. 14시간의 비행과 열흘 치 짐을 욱여넣은 배낭 때문이기도 했지만, 공항 곳곳에서 풍기는 대마 향에 파리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던 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우리가 우버를 부른 곳은 하필 택시가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우리는 다른 게이트에서 우릴 기다리는 우버 기사들을 찾느라 공항을 헤매며 1시간을 씨름해야 했다.
시작부터 꼬여버린 그날은 내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파리 시내를 한 바퀴 돌려고 했는데 대여 기계가 먹통이라 보증금 90만 원만 빼앗겼다(다시 돌려주겠지..). 뚜벅뚜벅 3만 보를 걷는 동안 예고 없이 퍼부은 소나기는 피했지만 대신 길에서 물벼락을 맞았다. 가보고 싶었던 카페는 공지된 시간보다 일찍 문을 닫아 입구만 서성이다 왔고, 숙소 바로 앞에선 만취한 거동수상자가 말을 걸어왔다. 개선문 위에 올라 황금색으로 빛나는 에펠탑과 아름다운 파리의 야경을 직접 봤다는 황홀함은 잠시, 침대에 누워서도 한동안 놀란 가슴이 쿵쾅댔다. 나무 뒤에 숨어 우리를 지켜보던 거동수상자의 끈질긴 시선이 계속 마음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튿날 파리에 살고 있는 선배를 만난 뒤에야 파리가 조금은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짧은 티타임 동안에 선배는 파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파리 사람들은 자유를 너무 사랑해서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는 자동차 블랙박스는 불법, 도로에도 CCTV를 잘 두지 않는다는 것. 그보다도 아름다움을 사랑해서 거리의 경관을 해치는 에어컨 실외기와 심지어 빨래조차 발코니에 못 내놓게 한다는 사실들. 우리를 무시하는 듯했던 식당 서버들의 냉랭한 태도가 인종차별이 아닌 "프랑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그렇다(...)"는 걸 알고 나선 이상한 안도감까지 들었다. 아, 그렇구나. 여긴 원래 이렇구나!
그저 관념어에 불과했던 파리의 자유, 권리의식,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존중 같은 말들은 파리의 전형적인 주택을 개조해 만들어진 선배의 사무실에서야 생생한 물성을 가진 말로 만져졌다. 태양왕의 초상화 옆으로 왕이 사랑한 예술가들의 초상이 나란히 걸려있던 루브르 아폴론 갤러리나, 힘으로 빼앗고 돈과 명예로 회유해 이웃나라에서 들여온 수많은 작품들로 말이다. 파리의 평범한 골목골목에까지 낭만이 깃들어있는 것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 도시의 집착적인 사랑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곳이 좀 징글징글하게, 징그럽도록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진 곳처럼 느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