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이 훤하게 파진 옷을 처음 입어본 건 스물네 살, 호주에서였다.
사람마다 노출의 문턱이 낮은 신체 부위가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 내게 가슴은 전자라면 등은 후자였다. 앞이 푹 파진 옷은 가끔 입었지만 뒤가 까진 옷은 어쩐지 벌거벗은 기분이 드는 거였다. 더군다나 환한 대낮, 서울 한복판에서라면? 등을 내놓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걸 입고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걷는 내내 모든 사람들이 내 등을 보면서 수군거릴 게 뻔했다.
호주로 출국하기 전 등에 천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검정 원피스를 산 건, 그래서 일종의 모험이었다. 호주가 아니면 어디서 이걸 입어보겠냐며 호기롭게 가져와놓고도 처음 입은 날엔 홈스테이 집에서 달아나다시피 현관을 나섰다. 부모님도 아닌데, 집주인 부부에게 이 옷차림을 들켜선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웬걸, 거리로 나가보니 더한 노출을 한 사람들은 물론 상의를 아예 탈의한 채 태연하게 조깅을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분방한 차림의 그들은 누드 비치가 아닌 평범한 해변에서도 수영복을 벗어던지며 파도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동양인 여자애의 놀란 눈은 신경도 안 쓰고선 말이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 인스타그램에 '파리'를 치기만 하면 지금 에펠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고, 시간과 돈을 들일 필요 없이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세상인데. 정보가 부족한 낯선 도시에 떨어져 구글맵 별점이 높은 식당엘 찾아가고, 블로그에서 '인생샷 명소'라고 소개된 스팟을 찾아가 괜히 사진을 찍어보는 동안 뭘 위해 이 먼 곳까지 왔을까, 잠깐 생각에 빠진 적도 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원피스, 여행 가서 입겠다며 2년 전에 사놓고선 이제야 개시한 앞뒤가 푹 파진 원피스였다.
어쩌면 나는 이 옷을 입기 위해 파리까지 온 걸지도 몰랐다. 내가 뭘 하든 뭘 입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좋아하는 옷을 아무렇게나 입기 위해. 파리의 낯선 이방인인 난 이곳에 발 붙이고 사는 파리지앵보다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도 있다. 스물네 살, 뒤가 푹 파진 옷을 입고도 스스로의 모습을 하나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그날처럼 말이다. 셋째 날 저녁 애인과 손을 잡고 들어간 레스토랑은 모처럼 한국인도 동양인도 하나 없는 완전한 이국의 식당이었다. 테라스 옆자리에서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사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간지러운 불어를 배경음악 삼아 애인과 대화하고 있으니 이곳의 적당한 무관심이 숨통을 틔워주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