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폴러드, 킴 딜의 <Love Hurts>를 한 곡 반복으로 들으면서 책상 앞에 앉아있다. 한낮에 읽은 소설 <안녕이라 말했어>의 여운은 하루를 지배하는 기분이 됐다. Love Hurts는 이 이야기의 모티프가 되는 노래다. 어쿠스틱 기타에 실연의 상처를 노래하는 남녀의 허스키한 보컬이 얹어지는데, 아득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담담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게 경쾌한 포크스타일의 원곡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J는 며칠 전 이 책을 보내줬다. 7년 전, 생일도 아닌 5월에 기억도 안 나는 이유로 소설 <비행운>을 건네주던 그가 올해엔 생일에 맞춰 책을 선물한 거였다. 예전부터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뜻 없이 책을 불쑥불쑥 내밀곤 했는데, J만큼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닌 난 J가 책을 선물해 주는 친구에 내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은근히 뿌듯했다. 김애란 작가님의 신간 봤니, 힐빌리의 노래가 이런 식으로 화제가 되다니 참 신기하다, 그래도 명작은 랭스로 되돌아가다야... 책을 주제로 이런 대화를 하고 있으면 내 안의 지적 욕망, 갈증이든 허영심이든 뭐라 불러도 상관없을 무언가가 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걸 느끼면서 내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이란 바로 이런 거라는 걸 깨닫기도 했다.
30대가 되어서는 학생일 때만큼 책이든 영화든 많이 보지 않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접하더라도 그 감흥이 예전만 하지는 못하다. 그러다 보니 사고의 패턴이나 감정의 결이 20대 때 만들어진 것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그러니까, J가 선물한 소설이나 Y가 추천해 준 영화, 동료들과 함께 좋다고 추켜세웠던 전복적인 비문학으로 쌓고 다져온 무언가 말이다. 좋아하면 닮아간다는 말이 있는데 난 좋아하면 그 사람을 좀 흉내 내게 된다. 표정, 걸음걸이, 웃을 때의 버릇, 물건을 쥐는 방식 같은 것들을. 선물 받고 추천받고 함께 본 책과 영화와 그 밖의 다른 것들에 대한 감상 역시 좋아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방식을 흉내 내다가 굳어진 어떤 습관일 수밖에 없다.
연인이 그렇듯이 친구 사이에도 이별이 있다. 삶의 어떤 순간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고, 그럴 때마다 멀어지는 무수한 인연을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배웠어"라는 노래 가사처럼 사람이 떠나간 후에도 그에게서 배워온 것들은 나의 일부로 남을 것이다. 어떤 이별 앞에서든 이렇게 담담하게 너한테 배웠다고, 정말 많이 배웠다고 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 너에게 배웠어, 정말 많이 배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