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엔 밖에 나가 곳곳을 쏘다니며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었다. 보타닉 가든의 벤치에서 따뜻한 플랫화이트를 마시며, 현대 미술관 카페에서 부족한 영어 탓에 잘못시켜 버린 미트파이를 먹으며, 한강공원처럼 한국인이 북적이는 천문대에서 시시각각으로 짙어지는 하버브릿지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나는 지금 시드니에 있다. 평생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싶었던 이곳에 약 10년 만에 다시 왔다.
고생길이 훤한 출장길에 등 떠밀리다시피 오른 거라 사실 비행기에 타서도 회사욕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시드니 물가 수준을 한참 얕잡아보는 예산으로 잡은 숙소에 체크인해 볕 안 드는 방의 쿰쿰한 냄새를 맡으면서는 당장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마침 비행기에서는 양옆으로 코를 골고 뒤에서는 의자를 젖히지 못하게 하는 승객들을 만나 10시간 내내 거의 한숨도 못 잔 상태였다. 최악의 일주일이 되겠군, 관광지 특유의 화려하고 활기 넘치는 거리를 우울한 표정으로 터벅터벅 걸으며 난 생각했다.
그늘이라곤 허용하지 않는 쨍한 햇살, 천진하리만치 파란 하늘 같은 걸 예상하고 왔지만 하루종일 하늘은 회색이었고 가끔 비가 내렸다. 그런데도 여기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톤을 높여서 웃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간 서큘러 키 앞에서는 무슨 축제를 벌이는 건지 왕자가 된 알라딘과 자스민 공주처럼 차려입은 인도계 사람들이 노래하며 춤추고 있었다. 까만 피부에 원색 드레스를 갖춰 입은 여자들의 춤사위가 특히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것과는 별개로 조금 시끄럽게 느껴져 커피는 공원에 가서 마셨다.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릿지가 멀리 보이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조깅을 하거나 잔디밭에 누워 책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음악이나 듣고 책이나 읽고 있자니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10년 전 호주에서 닳도록 들은 lost stars(키이라 나이틀리 버전이어야 한다..!) 덕분인지, 유머와 해학이 가득한 소설의 문장 덕분인지는 몰라도.
문득 이 도시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퀸 빅토리아 빌딩이나 록스 마켓, 하버브릿지를 향해 걷는 길목길목에서 10년 전의 잔상을 발견하기도 했다. 전부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10년 전, 태어나 처음 해외여행을 온 난 평소 안 하던 진한 화장을 하고 등이 다 파지거나 몸에 딱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는 이 거리를 걸었다. 그땐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하고 낯선 거리를 걷는 내 모습에 약간 도취됐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씻지도 않은 데다 기내용으로 가져온 크록스를 질질 끌고 있다. 그 간극에 웃음이 났다. 애초부터 이번 출장에 일말의 설렘도 없었기에 가져온 옷이라곤 미팅할 때 입을 슬랙스와 만삼천 원 주고 사 1년간 닳도록 입은 고무줄 바지가 전부였다.
집 앞 슈퍼를 갈 때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옷차림을 의식하니 정말로 이곳이 한없이 친밀하게만 느껴졌다. 가장 비일상적인 공간으로서가 아닌, 가장 일상적인 공간으로서 시드니에 내가 있다. 그러므로 이번 출장동안 나는 편안할 예정이다. 유명 관광지를 찾아보지 않고 바쁘게 일정을 짜지도 않으면서, 그저 주어진 일을 하고 시간이 나면 산책을 조금 하면서, 그렇게 이 도시의 가장 편안한 얼굴에 대해 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