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내가 10시가 되도록 늦잠을 자는 사이 준은 요리를 한다. 준의 몸이 유난히 부지런해지거나 나의 아침잠이 늘어지는 날엔 준이 운동과 예배를 마치고 장까지 봐올 무렵에야 내가 깨기도 한다. 겨울에는 그런 날이 많아져 더벅머리에 파자마를 입은 나와 단정한 외출복을 입은 준이 식탁 앞에 모이는 걸로 주말이 시작된다.
준은 평일엔 5~6시간씩만 자고 주말에는 그거보다 1~2시간 더 잔다. 그래봤자 평균 수면시간인데도 목욕탕에 다녀온 아이처럼 얼굴이 뽀얘지는 게 웃기다가 안쓰럽다. 엄마는 평생 아빠를 미워했으면서 틈만 나면 "니 아빠 불쌍하다"라고 했다.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크고 잔병치레도 덜한 준에게 안쓰럽다는 감정을 느낄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난다.
머리카락이며 얼굴 피부며 온통 겨울바람 냄새를 묻혀온 준이 장 봐온 식재료를 주섬주섬 꺼낸다. 고기, 채소, 두부 등 요리할 식재료와 함께 식후에 먹을 과일을 늘 빼먹지 않는다. 그걸 조리대에 올려놓는 준의 등은 구부정하게 굽어있다. 키가 163센티인 나는 설거지를 하거나 요리를 할 때 허리를 안 굽혀도 되지만, 한국 여성 평균 신장에 맞게 제작됐을 싱크대와 조리대가 준에게는 부러 몸을 낮추는 수고를 더해야 할 만큼 불편할 것이었다. 그래도 묵묵히 쌀을 씻고 부추를 썬다. 어깨와 등을 동그랗게 만 뒷모습이 동산처럼 귀엽다. 왜 영화나 드라마에선 남자들이 요리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한참 보다가 허리를 끌어안지 않나. 준은 그 여자들처럼 목선이나 허리가 가늘지도 않고 앞치마도 안 했지만 클리셰 속의 남자들이 그렇게 일관적으로 느끼하게 구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잠이 덜 깬 나로선 다가가 몸을 부비기엔 귀찮으므로 요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만 하기로 한다.
블루투스 스피커에는 주말용 플레이리스트가 나오고 있다. 오늘의 노래는 김수영의 알고 싶은데. 피처링 없이 혼자 부른 페스티벌 라이브 음원으로 틀어야 한다. "우리의 시간들이 좋았던 것도 다 알 것 같은데-" 가장 좋아하는 구간을 따라 흥얼거리고 있으니 버터 녹는 냄새가 집안에 퍼지기 시작한다. 오늘의 메뉴 명란솥밥이 완성되고 있다.
준과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명란 솥밥의 레시피는 정말 간단하다. 쌀과 물을 1:1로 냄비에 부어 밥을 짓고, 간을 맞추고, 뜸 들이기 전 쪽파나 부추 그리고 버터에 구운 명란을 얹으면 끝. 혼자 살 때는 이 간단한 요리를 해 먹을 엄두가 안 났다. 그땐 가슴께 정도 높이의 200 리터짜리 냉장고를 썼는데, 그 안엔 김치나 달걀 정도만 들어있어 별로 넓지도 않은 내부가 늘 텅 비어있었다. 한때 주식은 쌀죽이었다. 오직 쌀과 참기름, 간장만으로 만드는 이 음식엔 주변의 걱정을 사기 좋은 궁상맞음이 있었지만 그 시절의 허기란 딱 그 정도 음식으로도 달래지는 것이었다. 나에게 그럴싸한 음식을 해 먹이는 일이 귀찮았다. 귀찮기보다 버거웠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요리 당번은 평생 준이 하기로 했으니 둘이 같이 살게 된 앞으로도 내가 명란 솥밥 같은 것을 직접 해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나는 준이 아침마다 먹는 사과를 챙겨주기 위해 전날 저녁에 사과를 깎아 놓는다. 준이 일어날 무렵 깎아주면 좋을 텐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지런을 떠는 이 남자의 농업적 성실함을 이길 수가 없어 준은 간밤 사이 조금은 갈변한 사과를 먹는다. 준은 그걸로도 고마워하는 사람이라 갓 지은 명란 솥밥과 갈변한 사과 사이의 불균형은 이토록 쉽게 채워진다.
우리는 살아온 세월도 생활의 패턴도 다르지만, 나보다 당신을 챙기는 마음이 같아 그저 덤으로 살찌고 건강해지면서 겨울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