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시 Sep 13. 2022

석이를 떠나보내며

오랜 시간 함께 공부하고 술 마시고 웃고 떠든 석이가 두 달 전 세상을 떠났다. 그 애에 대해서 쓰고 싶었는데 어쩐지 그러기가 힘들었다. 아직도 이 세상 어디선가는 그 애가 읽은 책에 대해서 침을 튀겨가며 열띠게 이야기하고,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나도 안 웃긴 농담을 하고, 농담보다도 더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천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


석이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늦은 시간까지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보다 석이와 더 친한 발신인 J는 그런 식으로 밤에 불쑥 연락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만 눈치가 빨랐다면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려 한단 걸 알아챘을 텐데. 그러질 못해 완곡한 어법으로 전해지는 부고를 알아듣지 못했다. 석이가 떠났다고요? 어디를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한참을 횡설수설하다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로 되묻고 나서야 겨우 알아차렸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석이의 부고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날아들었다.


다음날 석이에게 가는 길엔 모든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기차를 타기 전부터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새벽까지 동기들에게 연락을 돌려 부고를 알리고 오가는 교통편을 분주하게 예약하고 검은 옷을 입고 출근해 일을 했다. 흐려진 집중력 탓에 업무를 끝내지 못해 KTX 안에서도 노트북을 켜야 했다. 석이를 빼놓고도 태연하게 굴러가는 일상이 뻔뻔한 얼굴로 슬픔을 방해하는 것만 같았다. 그 애의 부재가 건조하게 적힌 한 줄의 부고 그 이상이 될 수 없게 하려는 듯이. 결국 석이의 곁에 도착하고 나서야, 영정사진을 찍어뒀을 리 없는 석이가 우리가 사랑한 아이 같은 웃음을 띠고 한 손으로 브이를 그린 채 제 조문객들을 맞고 있는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때서야 비로소 실감했다. 석이가 죽었다. 나도, J도, 그 누구도, 그 애의 웃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석이의 장례는 떠들썩한 슬픔 가운데 치러졌다. 석이를 배웅하기 위해 간만에 모인 친구들이 그 애의 가는 길을 조금은 편안하게 만들어줬을까. 적어도 석이 아버지에게 우리들의 존재는 꽤 위로가 됐던 것 같다. 석이가 착한 애라 친구들이 많이 모였다면서 아버지는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말하셨다. 그런 석이 아버지를 두고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많은 친구들이 늦은 시간까지 빈소를 지켰고, 몇몇은 서울 가는 막차가 떠나도록 석이 곁을 떠나지 못해 그날 밤을 그 애의 고향에서 보내기로 했다. 모두가 내일 출근을 해야 했지만 그런 걱정은 석이를 마음껏 추모하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우리는 늦은 시간까지 각자가 지닌 그 애와의 추억을 앞 다투어서 꺼냈다. 석이와 관련된 웃긴 일화들이 많아 눈이 퉁퉁 부은 사람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웃기도 했다. 많은 말이 오갔다. 하지만 모든 말은 이루지 못한 희망을 담은 미결의 문장이었다. 석이 밥이라도 사주러 한 번 내려올걸. 시험공부 오래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잘 지낸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걸. 아픈 데는 없는지 한 번 더 물어볼걸. 힘없이 흩어지는 말끝마다 침묵이 찾아왔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석이를 영영 잃었다는 것을 함께 느꼈다. 그게 견디기 힘들어 숙소에 친구와 나란히 누워서도 석이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있잖아, 석이 떠나기 전에 아프진 않았을까?" "아프지 않았을 거야. 분명히 그랬을 거야." 이제와 아무 소용없는 이런 이야기들을.


진주에서의 밤이 깊어질수록 하나의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제 석이는 영원히 과거형으로만 말해질 것이다. 더 이상 그 애의 오늘과 내일을 궁금해할 수 없다. 잘 지내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공부는 잘 되어가는지, 그 아무것도. 우리가 그 애를 위해 바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지막 순간 아프지 않았길 기도하는 것뿐이다.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세계로 석이는 떠났다. 아직도 이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여기에 남겨진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아무 소용없어도, 대답이 돌아올 리 없어도, 우리가 있었던 과거에 대해서 떠올리고 질문을 던지고 기도하고, 그렇게 석이를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잊히고 있지만 석이와 함께 한 시간만큼은 잊어선 안 되겠기에. 그 기억만이 석이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이기에. 그래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쓰다 보니 이제는 알 것도 같았던 그 애 없는 세상이 다시 낯설게 다가온다.


석아. 너는 나랑 친구로 지내면서 좋았을까? 나는 정말 좋았어. 고마웠어. 너도 그랬기를 바라고 바래.


작가의 이전글 엄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