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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Oct 14. 2022

나의 취미는 지난 연애편지를 읽는 것

태어나길 금사빠로 태어나 늘 누군가에게 쉽게 반했다. 첫사랑은 초등학생 때 친구를 따라 간 교회에서 만난,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본 적 없는 남자애. 유난히 얼굴이 하얘 혼자 다른 세상에 떨어진 듯 신비로워 보였던 그 애는 크게 소리 지르며 여자애들 브래지어 끈이나 튕기던 또래 남자애들과 달리 늘 단정한 차림으로 차분하게 말했고 수줍게 웃었다. 아는 거라곤 이름과 나이뿐인데도 걔의 그런 점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래서 맛있는 간식이 나오지 않는 날에도 교회엘 나갔고 밤이면 그 애가 웃을 때 눈이 접히는 모양이나 움푹 들어가는 보조개, 좋은 향을 내며 찰랑거리던 머릿결 같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일요일마다 먼발치에서 훔쳐보는 게 전부였던 소심한 첫사랑은 그 애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속수무책으로 끝나버렸다. 열한 살 인생 첫 실연, 그건 카드캡터 체리가 결방한 금요일만큼이나 쓸쓸한 것이었고 사랑의 아픔을 알게 돼 한 뼘쯤 성장한 기분이 들도록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해 난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로 시작되는 체리의 OST에서 졸업해 어른의 발라드 가요를 듣기 시작했다. 잘 먹고 잘 자고 걔가 떠난 날 조금 슬펐을 뿐 울지 않았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한숨도 못 자며 하루 종일 울기만 한다는 작사가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그 애가 하필 이사도 아니고 전학도 아니고 이민을 가버린 건 이별에 깊이 몰입하기 좋은 결말이기도 했다.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 서사를 완성하기에 이민보다 적절한 사건이 있을까.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이 이야기에 제 발로 들어가 갇힌 나는 오랫동안 마음껏 그 애를 그리워하며 애틋할 수 있었다.


그 애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후에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쉽게 사랑에 빠졌다. 매일 같은 버스에서 마주친 옆 학교 남자애를 아침마다 기다렸 아르바이트 동료가 회식 때 내 접시에 고기를 올려주길래 반했다. 친구의 손이 참 단정하고 예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걔가 다르게 보였다. 한심할 정도로 별 거 아닌 이유들이지만 이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둔갑시키는 게 바로 사랑의 힘이었다.


이 힘이 아름답고 낭만적이기만 하다면 좋을 테지만 섣부르게 달아오른 마음은 상처받는 날이 더 많았다. 나의 안목은 성급함과 반비례해 후졌고, 바람을 피우거나 폭력적으로 굴거나 끊임없이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치명적인 결함들을 사귄 후에야 뒤늦게 알곤 했다. 알고 나서도 헤어질 결심을 하기까지 늘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간단히 시작한 관계라고 결말까지 그럴 순 없는 법이었다. 어떨 땐 첫눈에 반한 별 거 아닌 이유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 헤어져야만 한다는 모두의 만류를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기도 했다.


쉽게 반하는 것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고 나쁜 연애의 경험치가 쌓일수록 진짜 사랑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돼간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쉽게 반하고 더디게 깨고 다시 쉽게 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도처에 널린 사랑의 가능성을 포착하기 위해, 사랑에 빠질 구실을 찾아서, 이 사람에겐 어떤 사랑스러운 점이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보는 사람과도 같이. 이제 다신 사랑 안 하겠다고 비장하게 다짐한 적도 있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사랑하며 받은 상처 쪽으로 저울이 반드시 기우는 건 아니었다. 한심하고 엉망인 연애의 연대기 속엔 반짝거리는 순간들도 지척에 널려있었다. 보고 싶다며 집 앞에 불쑥 찾아와 건넨 꽃다발, 첫 키스의 여운을 오래 매만지느라 동이 틀 때까지 걸었던 순간, 오랫동안 꽁꽁 숨겨온 서로의 비밀을 나눈 날, 처음으로 우는 얼굴을 보고는 밤을 새워 쓴 편지 같은 것들. 그런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지난 연애편지들을 꺼내 보게 된다. 끝내 우리가 시간의 힘에 져버리고 권태나 불신, 욕망 같은 나쁜 감정들에 져버렸어도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해 분투하던 시절이 정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 마음에 기대지 않고는 보낼 수 없었던 계절이 분명 거기에 있었다.


어떤 과거는 힘이 너무 세서 언제고 나를 나락으로 끌고 가지만 또 다른 과거는 힘이 너무 세서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용기를 주기도 한다. 네모 반듯한 편지지에 정갈하게 담긴 순간들을 응시하며 난 생각한다. 먼 훗날 이때를 돌아보면 언제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거라고. 또한 생각한다. 이런 순간들이 지척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한 여전히 나에겐 사랑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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