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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Feb 12. 2023

낡은 장, 슬립, 냄새

오감에세이: 후각

오늘 입을 옷을 고른 다음엔 어김없이 취하는 버릇이 있다. 옷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크게 숨을 마시는 일. 들이켜는 숨에 창문 열린 베란다에서 밴 바람 냄새나 베란다에 옷을 걸기 전 뿌린 탈취제 냄새같은 것들이 들어온다. 동시에 이 옷이 다녀간 공간과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의 자취가 줄줄이 그려진다. 아. 이 옷은 안 되겠다. 그제 밤 이자카야에서 풍기던 눅눅한 기름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을 건 뭐람.


세 들어 사는 집의 붙박이장은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졌다. 지은 지 30년도 더 된 집이니 옷장 나이도 그쯤 됐을 것이다. 전 세입자가 문을 하얗게 칠해놔 겉모습은 멀끔한데 옷을 꺼낼 땐 묵은 세월이 훅 끼친다. 방향제를 뚫고 나오는, 먼지 눌어붙은 나무 특유의 퀴퀴한 냄새로부터. 냄새가 어찌나 끈질긴지 두어 계절 옷을 넣어두면 빨래 한 번 정도론 섬유에 밴 쩐내가 가시지 않는다. 하필이면 잘 안 입는 잠옷을 친구에게 내어줬다가 이 사실을 알았다. 옷을 갈아입은 친구에게서 꿉꿉한 냄새가 폴폴 풍겼기 때문이다. 그 순간 걔가 오기 전 신경 써서 청소하고 집을 정돈한 게 아무 쓸모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냄새나는 낡은 집과 게으른 살림 앞에서 그런 손맞이는 정말이지 아무 쓸모가 없었다. 옷을 입기 전 코를 처박고 냄새를 맡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다.


정 반대의 충격을 중학교 때 놀러 간 친구집에서 받은 적이 있다. 처음으로 가 본 걔네 집의 첫인상은 눈부시게 화사하다는 것. 인테리어라는 게 지금처럼 흔한 관심사가 아니던 시절이지만 민트색 벽지와 아이보리색 가구로 꾸며진 방을 보며 나는 일찍이 깨달았다. 이게 인테리어구나. 압권은 중세 유럽 어느 소왕국 공주가 썼을 것만 같은 옷장이었다. 유려한 곡선과 세련된 손잡이로 장식된 그것을 옷장이라고 부른다면 빛바랜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우리 집 가구는 옷장이 아닐 것이었다. 뽀얀 공주풍의 그 옷장은 안에서도 좋은 냄새가 나, 서랍을 열어 꺼내는 옷마다 따뜻하고 포근한 향기가 배어났다. 그걸 맡고 있자니 걔 방은 땀 냄새와 체취, 음식 잡내가 가득한 지리멸렬한 일상과는 동떨어진 공간이 되는 듯했다.


순간 걔네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슬립 같은 걸 입고 얼굴엔 팩을 붙인 채 우리를 맞아주셨던. "어머~"라는 감탄사와 함께 우아한 말씨로 인사를 건네셨던. 나는 걔네 엄마가 곱게 매니큐어를 바른 반지 낀 손으로 햇볕에 바싹 말린 옷을 개는 장면을 상상했다. 어쩐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었다. 걔네 엄마의 광 나는 피부나 슬립, 매니큐어, 반지가 있는 한 그 집에는 절대로 퀴퀴하고 꿉꿉한 냄새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우리 집엔 없는 거였다.


냄새에는 생각보다 많은 게 집약돼 있다는 걸 그때 느꼈다. 볕이 잘 드는 화사한 집과 가끔 곰팡이가 피는 낡은 집에서 나는 냄새는 같을 수가 없다.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꼼꼼히 살필 수 있던 친구 엄마가 집안 곳곳 피워내던 향은 또한, 새벽같이 가게에 나가는 우리 엄마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삶의 또 다른 차원이었을 것이다. 좋은 향을 뿜어대는 저렴한 가격의 향초, 디퓨저, 인센스… 그 무엇을 넣어놔도 쉽게 가시지 않는 낡은 옷장의 냄새를 속수무책으로 느낄 때마다 세대를 걸쳐 끈질기게 따라붙는 어떤 꼬리표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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