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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Feb 19. 2023

"이모, 오늘은 이모랑 같이 잘래."

며칠 전 언니에게서 사진을 한 장 받았다. 일곱 살 된 조카 대추가 상앗빛 쌀알 같은 뭔가를 손바닥에 올리고 찍은 사진이다. 그건 너무 작고 대추는 유난히 귀엽게 웃고 있어 처음엔 손에 뭘 갖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참 사진을 살펴보다가 뭔지 알아챘다. 대추가 처음으로 뺀 유치였다.


언니가 뒤이어 보낸 영상엔 대추가 이를 빼는 순간이 담겨있었다. 대추 이에 묶인 실을 잡은 언니가, 아이 이마를 손바닥으로 빠르게 밀치는 장면이었다. 탁! 아이가 잠깐 휘청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는다. "빠졌어? 빠졌어? 빠졌다!!" 이가 무사히 빠졌음을 알리는 언니의 환호성. 그제야 마음 놓고 방방 뛰며 환호하는 아이. 와!.. 와!!!


언니는 아프지 않았냐고 묻고는 잘 참은 아이를 안아줬다. 영상을 찍으며 지켜보던 형부도 대단하고 멋지다며 대추를 치켜세웠다. 화면 속의 대추는 무척 씩씩하고 언니와 형부의 목소리는 너무 따뜻해 왠지 뭉클해졌다. 아이의 말랑한 입안에 쌀알만 한 이가 돋아나고 있다고 신기해하던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대추 역시 자기의 몸과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을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다. "언니가 된 기분"이라고 첫니가 빠진 소감을 말한 걸 보니. 물론 그 언니는 아직 이빨 요정이 젖니를 가져가 연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모쪼록 언니가 된 기분이 대추를 한껏 용감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그 주말 대추는 안 하던 일에 도전해 보기로 한다. 바로 나와 함께 우리 집에서 자는 것이다. 그것도 엄마 없이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냐면 대추는 7살 평생 딱 하루를 빼고는 늘 엄마와 꼭 붙어서 잔 아이였다. 그 하루란 지난해 언니가 6년 만에 친구집에서 자고 온 날로, 그때 언닌 단 하루 외박을 허락받기 위해 꼬박 일주일 동안 아이를 설득해야 했다. 그렇게 엄마를 보내주기로 해놓고 당일 배웅길에 주차장이 떠나가라 운 아이가 대추다.


그런 대추가 생에 첫 외박을 결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어서 약간의 우여곡절은 물론 빠질 수 없었다. 이모랑 같이 자고 싶다고 한 건 대추였어도 사실 대추는 내가 자기 방에서 자고 가길 원했다. 차선이래 봤자 엄마 아빠와 다 같이 이모네서 자는 것. 어느 쪽이든 대추를 뺀 모두가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모는 대추랑 둘이서만 자고 싶은데?" 나의 선호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아이... 이럴 땐 역시 어른의 재력을 보여줘야지. "이모 집에 가는 길에 장난감 사줄게!" 돈은 언제나 효과가 좋은 법이다.


조카를 향한 나의 구애 전략은 엄마가 못하게 하는 걸 하게 해주는 것이다. 대추와 함께한 하루도 이 전략을 충실하게 따르며 보냈다. 장난감 가게에서 장난감을 두 개나 사주고, 저녁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고기를 먹고, 카페에 가서 케이크와 딸기우유도 먹었다. 집에 와서는 엄마가 안 사주는 뿌요소다를 마시면서 함께 포켓몬 그림을 그렸다. 난 이름조차 처음 듣는 포켓몬들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검색창을 켰다가 그림창을 켰다가를 반복해야 했다.


평소 자는 시간을 훌쩍 넘긴 밤 12시. 대추는 나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조용히 누워있으니 엄마가 보고 싶어졌는지 조금 울먹였지만 다행히 울진 않았다. 첫니를 뺐을 때만큼이나 커다랗게 성장하는 밤을, 그날 대추는 보내고 있었다.


마주 보고 누운 대추의 등을 토닥여주며 오늘 하루가 즐거웠는지 물었다. 다행히 대추는 아주 즐거웠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이모와 함께 그림을 그린 게 제일 재밌었다고도 했다. 그림 그리길 좋아하는 대추는 화가가 되고 싶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림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그중에서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아이의 말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이모도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 대추의 그림은 이모를 늘 행복하게 해. 그 말에 아이는 졸음으로 반쯤 감겨있던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웃을 때마다 이가 빠진 자리가 도드라져 보였다.


아이를 안는 건 사람을 좀 주책맞게 만든다. 많이 컸어도 여전히 내 품을 반도 못 채우는 아이를 안고 있으니 이 아이가 앞으로 커갈 날들이 만져지는 듯했다. 그 시간 동안 아이가 겪을 모든 처음을 나는 지금처럼 울렁이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될 것이다. 대추는 처음으로 이모와 단 둘이 보낸 오늘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이모는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잃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대추는 오늘을 오래오래 기억해 주길, 때때로 이 기억에서 힘을 얻을 수 있길 욕심내게 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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