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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Feb 26. 2023

샤브샤브의 맛

오감에세이: 미각

모난 곳 없이 평범해 오히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장면이었는데, 그땐 그저 흘려보냈는데, 이상하리만큼 마음에 오래 남아 '아, 그때 내가 행복했구나…'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


그날 나는 내 방에서 일을 마치고 거실 소파에 누워서 책을 보고 있었다. 가벼운 소설이었다. 동생은 거실 옆에 붙어있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배추를 넣은 된장찌개와 고기와 각종 야채로 속을 넣고 찐 양배추말이였다. 취사가 끝난 밥솥에서 올라오는 고소한 밥 냄새. 찌개가 보글거리고 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 온 집안을 훈훈하게 덥히는 따뜻한 음식의 기운. 소설의 줄거리를 좇는 동안 코와 귀와 피부로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이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 나와 함께 나눠먹을 밥을 짓고 있다. 그게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한 부분이 됐다.


그때 나와 동생은 같이 산 지 얼마 안 됐었다. 고향을 떠나 자취하며 간간이 친구들과 산 적이 있었지만 동생과의 동거는 좀 더 특별한 무언가였다. 바로 코로나 때문이다. 나는 재택근무를 하고 동생은 코로나 휴직을 하느라 우리는 집에서 많은 시간을 붙어있었다. 10평짜리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지어먹고, 답답할 때는 동생의 에어팟을 나눠 낀 채 따릉이를 타고 한강을 돌았다. 핸드폰과 거리가 멀어지면 노래가 끊기기 때문에 나는 늘 빨리 달리지 못하는 걔 자전거를 천천히 뒤쫓았다. 혼자일 땐 기어를 최대치로 높여 빠르게 달리는 걸 좋아했다. 동생을 따라 천천히 걷듯 달려보니 물 냄새나 풀 냄새, 들꽃향 같은 것들이 더 잘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자전거를 다 타고는 어김없이 배스킨라빈스에 들려 아이스크림을 포장해 왔다. 민트초코, 엄마는외계인, 아몬드봉봉, 이 세 가지 조합을 지키는 건 우리만의 약속이었다.


그건 뭐랄까, 원하는지도 몰랐던 어떤 욕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동생과 음식을 나눠먹고 나란히 산책하는 일상이 분명 내게 잔잔한 풍요와 만족,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혼자 사는 편이 체질에 맞다고 믿어온 사람으로서 이런 감정의 발견이 약간 충격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 음식 나눠먹기가 자매 간의 일상을 넘어선 하나의 행사로 커지기까지 했다. 동생이 내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기 시작한 거였다. 걘 친언니만큼이나 따르는 언니들에게 손수 만든 요리를 대접해주고 싶어 했다. 요리를 안 하고 못하고 싫어하는 나로선 그게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걘 그런 마음이 든다고 했다. 메뉴는 늘 같았다. 바로 샤브샤브다.


처음으로 샤브샤브를 대접하기로 한 날(사실은 동생이 대접하고 나는 옆에서 꼽사리를 끼기로 한 날), 우린 좀 분주했다. 당근마켓에서 멀티쿠커를 거래하느라 이웃 동네에 갔고, 오는 길엔 한 무더기의 야채와 고기와 과일을 샀고, 친구들이 오길 기다리며 집을 조금 정돈하다 육수를 우려내고 재료를 손질했다. 2인용 식탁에 네 사람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샤브샤브를 나눠먹고 있으니 좀 알 것 같았다. 동생이 왜 그렇게 이 요리에 진심이었는가를. 오직 이걸 위해 나한테 운전을 시켜 멀티쿠커를 사 올 만큼... 샤브샤브란 나눠먹기라는 행위가 극대화될 수밖에 없는 메뉴였다. 실제로 한 냄비의 음식을 함께 먹는 거기도 했지만 야채와 고기가 익길 기다리며 조금씩 천천히 먹어야 하는 거기도 했다. 평소 밥을 빨리 먹든 느리게 먹든 샤브샤브 앞에선 젓가락질 속도가 얼마간 일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육수와 재료만 준비해 놓으면 요리를 대접해 주는 사람이 식탁에서 소외되는 일도 없다. 각자 알아서 먹고 싶은 만큼 야채와 고기를 넣으면 된다.


무엇보다도 분위기. 샤브샤브엔 그것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 천천히 끓는 육수, 채소와 고기가 익으며 나는 냄새, 따뜻한 김이 가득 차는 공간, 둘러앉아 분주하게 재료를 넣는 사람들, 느린 식사의 틈을 채우는 시답잖은 대화, 웃음소리. 이런 것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내는 따뜻함과 다정함, 복닥복닥함이. 야채를 오래 끓인 육수에 고기를 익혀 먹는 맛이 나쁠 수가 없지만, 이 요리 특유의 분위기가 샤브샤브의 맛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행복은 커다랗고 대단한 무언가가 아닌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에 깃들어있는지 몰랐다. 손수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나눠먹는 샤브샤브 같은 것들에. 또한 모르는 일이다. 이런 기억들이 모이고 모이면 커다란 파도가 닥쳐올 때 기꺼이 탈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건지도.


영화 <돈룩업>의 마지막 장면에선 가족, 연인, 친구들이 함께 모여 최후의 만찬을 즐긴다. 사랑과 감사, 용서의 말이 넘쳐났던 그 식탁 위에 차려진 요리는 뭐였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칠면조 요리, 치킨 수프, 샐러드와 빵 같은 것들이 올라가 있었겠지. 만약 내게도 그런 식탁이 차려진다면 그 위엔 분명 샤브샤브가 올려져 있을 것이다. 샤브샤브를 나눠먹는 둥근 저녁이야말로 그런 날에 가장 어울리는 모양의 행복일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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