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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Apr 03. 2023

새해 일기

올해를 맞아 새긴 다짐을 기억한다. 1월 1일,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난 한 가지를 마음먹었다. 매일 일기를 쓰겠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겠다! 술에 떡이 돼 집에 들어오더라도 뭐라도 쓸 것이다!


새해가 됐단 이유로 안 하던 짓 하기. 30년째 벌어지지 않은 그 일이 31년째라고 벌어질 리는 없고 세상 대부분의 다짐처럼 이 다짐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스무 밤이 지나서야 새해 첫 일기를 썼다. 두 번째, 세 번째까지 열심히 썼는데 일이 미친 듯이 바빠지면서 또 관뒀다. 정말 일기 한두 줄 못 쓸 만큼 바빴겠냐마는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일기 쓸 시간에 더글로리도 봐야 하고 더글로리 밈도 알아둬야 하고 그걸 가지고 친구들이랑 실없는 농담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보다는 그럴듯한 이유가 하나 있긴 하다. 내가 행복했다는 것. 행복해서 일기가 잘 안 써졌다는 것이다.


늘 사람들이 일기장에 뭘 쓰는지 궁금했다. 슬픔, 서러움, 어색함, 공허함, 모멸감, 분노, 부끄러움, 불만족, 부조리함… 난 주로 이런 것들을 썼으므로 다들 그런지 알고 싶었다. 물론 365일 내내 슬프고 서럽고 어색하고 공허하고 모멸스럽고 화나고 부끄럽고 불만족스럽고 부조리한 건 아니었다. 평화롭고 기쁘고 충만하고 행복한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어떤 날은 농담과 유머로 가득해 배가 찢어지게 웃었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는 저런 것에 대해 말하는 게 더 익숙했다. 그게 내가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음악가인 친구의 연인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댔다. "널 만나고 나서 음악이 안 돼. 너무 행복해서…." 맥주를 마시면서 듣기엔 느끼한 말이라 난 약간 웃었다. 웃고 나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얼굴도 모르고 무슨 음악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해할 것 같았다. 온화한 기쁨이 잔잔하게 흐르는 친구의 세계에서 그가 느꼈을 행복과 그보다 커다란 불안 같은 것들을. 너무 오래 불행에 대해 생각한 사람들은 그럴 수 있었다.


자기 안의 그늘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이런 시선을 특별하게 여겼다. 온통 환하기만 한 사람보다는 가끔씩 쓸쓸한 표정을 하는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 그들의 결핍을 사랑했고 그들이 쓰는 글을 사랑했다. 그래서 같이 글 쓰는 사람이 힘든 일이라도 겪으면 응원한답시고 말했다. "지금의 경험이 좋은 자양분이 될 거야." 하지만 대개는 너무 오래 아픈 사람이었다. 이제 그만 아플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글을 너무 아낀 나머지 그랬다. 이 잘못을 난 너무 늦게 알았다.


여전히 결핍이 많은 사람들의 글을 좋아하지만 조금은 아픈 마음으로 본다. 모두가 예술가이기 이전에 일기 쓰는 사람들. 적어도 일기장에는 행복에 대해서 적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 불행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행복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새해 다짐을 고치기로 했다. 행복에 대해서 쓰자고. 내가 어떤 농담에 웃는지 어떤 순간을 충만하다고 여기는지 어떤 사람들과 있을 때 즐거워하는지, 기억력이 나쁜 내가 자꾸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걸 기억하기 위해서 오늘부터 쓴다. 오늘 나는 행복했다고. 이 결심은 세상 모든 결심에게 닥칠 운명을 조금 유예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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