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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Apr 10. 2023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아빠가 서울에 놀러 온 어떤 날을 기억한다. 첫날 나와 함께 광화문 종로 일대를 구경한 아빤 둘째 날 뜻밖의 장소에 가고 싶다고 했다. 바로 홍대였다.


홍대란 어떤 곳인가. 언제 어느 때나 다채로운 젊은이들로 미어터지는 곳. 느릿느릿 충청도 말을 쓰는 아빠에겐 모든 게 너무 빠르고 정신없을 동네. 아빤 거기서 딱히 뭘 하고 싶은 건 아니라고 했다. 그냥 궁금한 것 같았다. 남들 다 간다는 곳이면 꼭 한번 가고 싶어 하는 아빠가, 좀 많이 젊은 남들이 다 간다는 홍대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동넨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빠와 함께 홍대에 간단 생각을 할 때부터 피곤했던 난 홍대입구역 9번 출구로 나가기 위해 긴 줄을 설 때쯤 약간 짜증이 났다. 시장통처럼 북적이는 2층짜리 카페에 들어섰을 때는 간절하게 집에 가고 싶어졌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동네에 온 게 오랜만이었다. 이런 데서 어른을 모시는 일은 생각보다 더 간단치 않았다. 카페에 간신히 자리를 비집고 앉았지만 내뱉는 말엔 어쩔 도리 없이 약간의 책망이 섞여있었다.


"아빠, 아빠는 이런 데가 좋아? 나는 사람 많은 데 오면 너무 피곤하던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 너머 무리 진 사람들을 구경하던 아빠가 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


"좋지 뭘. 아빠가 외로워서 그래."


아빠를 제법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빠는 한 번도 가족의 생일을 챙긴 적이 없을 정도로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외로움을 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왜 아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외로워하는데. 주변에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아빠 나이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겠지. 설익은 활기로 가득한 곳에서 사물처럼 앉아있는 아빠를 보며 처음으로 그 사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외로움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내가 금사빠인 이유부터가 외로움을 많이 타기 때문이니까. 외롭지 않기 위해 곁에 누굴 두고 싶어 하는데 그 핑계를 사랑에서 찾는 것뿐이다. 내가 금방 사랑이 식는다면 그것 역시 다른 의미로 외로워서다. 어떤 종류의 외로움은 아무나 곁에 둔다고 해서 채워지지 않으니까. 아니, 어쩌면 누굴 곁에 두더라도 그럴 거니까. 사랑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모든 관계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이 참 간사한 존재여서 어떨 때는 이 두 개의 외로움이 오락가락도 한다. 만날수록 공허해지는 탓에 연락하는 것조차 꺼러 졌던 사람도, 정말 혼자구나 싶을 땐 반갑게 느껴지는 일이 있다. 이런 마음이 드는 내가 싫다가도 외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면죄부가 주어지는 기분이다. 나만 그런 거 아니니까. 사람은 다 외로우니까. 그래도 여전히 찝찝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까지 외로움에 져야만 하나?


나이가 들면 외로움에 대해 조금은 도가 틀 줄 알았는데 아빠를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무심해지고 무뎌지더라도 모두가 혼자인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어쩌면 외로움이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커다랗고 낯설어지는 게 아닐까. 산다는 게 다 외롭지 않으려는 끝없는 싸움인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많은 게 벌써부터 지겨운데 뾰족한 수는 없다. 아빠의 외로움을 알게 된 그날부터 신경 써서 연락하고 집에도 자주 찾아갔지만 그래도 아빠는 홍대 카페에 앉아있던 그날의 쓸쓸한 표정을 가끔 지을 것이다.


그 표정은 오직 아빠의 몫이다. 내게도 온전히 나에게만 주어진 외로움이 있는 것처럼. 서로를 곁에 두고도 외로운 우리는 제 몫의 외로움을 혼자 짊어지는 것밖에는 별 수가 없어 보인다. 다른 사람, 다른 물건, 다른 어떤 것에 나의 외로움을 지나치게 의탁했다간 외로움과의 싸움에서 너무 형편없이 지게 되니까. 잘 외롭자. 매번 다짐하고도 잘 지켜지지 않지만 그래도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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