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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May 15. 2023

오해

드물게 좋은 어른인 박은 회사에서 건배사하는 신입들을 보면 그렇게 징그러울 수가 없다고,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을 한껏 비틀면서 말한 적이 있다. 갓 입사해 교육받을 때만 해도 눈을 반짝이던 애들이! 조직 생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상한 것만 배워서는! 부장들보다 더한 능구렁이가 돼서! 그런 건배사를 해! 라며 박은 핏대를 세웠다. 박과 달리 내가 몸 담은 조직은 돌아가며 건배사를 부추기는 곳은 아니지만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 생각해봤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박이 가장 혀를 내두르는 건배사는 내 입에서 나올 것이리라.


난 사회적 자아가 과잉 발달돼 언제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장단을 맞출 수 있는 편이다. 심지어 끝없이 남을 웃기고 싶어 하는 어떤 욕망이 있어 분위기에 적절히 어울리는 농담을 하길 즐길 때도 있다. 능숙한 건배사로 부장의 만족스러운 박수갈채를 받아내는 박네 회사의 신입사원들처럼. 박이 밥을 먹다 말고 (나 같은..) 몰개성한 징그러운 신입들에 대해 열변을 토한 건 나 찔리라고 한 소리는 물론 아니다. 그냥 나의 이런 면을 모르는 것뿐이다. 환갑이 넘는 세월을 지혜롭게 보낸 게 분명한 이런 사람도 끝없이 다른 사람을 오해하면서 산다. 나는 박의 오해가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냥 맞다고 맞다고 맞장구치고 말았다.


10년 전에는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슬펐고 10살 더 나이 먹은 지금은 차라리 오해에 대해서 생각한다. 남을 오해하는 것이 그렇듯 나를 오해하기란 또 얼마나 쉬운지. 한때 난 장단을 잘 맞추는 내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다. 분위기에 휩쓸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던 숱한 날들이며 다음엔 안 그래야지 했지만 바뀌지 않는 내 모습이며. 이게 아닌데, 난 원래 말의 무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중한 사람인데!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을 한 데 묶어주는 어떤 분위기를 느끼고 그 속에서 웃는 얼굴들을 보는 게 좋은 마음도 분명 있었다. 오해가 없는 순도 100%의 '진짜 나'라는 게 있다면 사람들 틈에서 바보 같은 농담을 하는 모습과 혼자가 돼서 그걸 후회하는 모습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텐데. 난 그냥 원하는 방식대로 나를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이상하고 별로인 면이 있다는 걸 아는 게, 또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는 게 스스로에 대한 오해를 줄이는 길일 것이다. 타인에 대해서도 물론 마찬가지. 이해하고 싶은 방식대로만 이해하지 않기,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하지만 박의 오해와 같은 기분 좋은 오해에 대해서는... 난 기꺼이 입을 다물 것이다. 공평하게 나도 한 번쯤 박의 나쁜 점들을 눈 감아주고 기꺼이 오해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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