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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May 29. 2023

우린 노래가 될 수 있을까

5월 휴가 일기

환갑이 넘은 아빠와 예순을 바라보는 엄마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부쩍 자주 한다. 평생을 육체 노동자로 영세 상인으로 살아온 부모는 성실하게 일하는 법 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누군들 입에 달고 사는 '힘들다'는 말이 그 입에서 나오는 건 좀 다른 얘기가 된다. 통화할 때마다 점점 더 힘이 빠지는 듯한 부모의 목소리에 결국 난 서울에서 쉬엄쉬엄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겠다던 계획을 접고 휴가 첫날부터 고향으로 향했다.


일터를 옮긴 후 토요일 잔업이 많아진 아빠는 일요일 하루를 쉰다. 이번 주에는 그 하루를 나와 청남대에서 보냈다. 대청댐에 둘러싸인 옛 대통령 별장 청남대는 지난 추석 때도 아빠와 내가 다녀간 곳이다. 그때 아빠는 여태껏 청남대도 한 번 못 가봤다며 신세를 한탄하는 말로 나를 움직였고, 지금은 늦도록 깨지 못하고 기운 없이 소파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날 움직인다.


하루가 다르게 늙고 작아지는 아빠를 볼 때마다 나는 우리의 시차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아득하게 흘러왔고 지금도 붙잡을 수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아빠의 시간에 대해. 문의면까지 운전하는 한 시간 동안 차 안에는 나훈아나 조용필의 노래가 나왔다. 아빠나 들으라며 튼 노래였는데 이날은 왠지 이걸 들으며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 노랫말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내가 가보지 않은,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의 노래이긴 마찬가지였다. 언제나처럼 우리는 별다른 대화를 하진 않았다. 그저 같이 걷고 아름다운 대청호를 바라보고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오는 길에 함께 저녁을 먹은 게 전부였다. 


이튿날엔 엄마가 가게를 쉬는 날이라 마침 휴무가 겹치는 동생과 함께 나들이를 다녀왔다. 모처럼의 모녀 나들이어서 언니도 조카 대추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우리와 동행하기로 했다. 우리는 바다에 가지 않았다. 산에도 가지 않았다. 그저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곰이 있다는 공원엘 다녀왔다. 슬렁슬렁 걷기만 하면 한 시간 안에도 돌아볼만한 규모였다. 그런 곳에 가는 것뿐인데 다섯 여자가 모였다는 이유로 큰맘 먹고 먼 여행길에 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목적지는 어디든 상관없다.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기 바쁜 우리는 한날한시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벤트이니까. 기억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고, 이제는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양임을 받아들인다.


엄마, 조카와 한 공간에 있는 건 기분이 묘해지는 일이다.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한, 유년의 간지러운 추억을 떠올리게 해서다. 나에게 대추가 그렇듯 삶의 어느 순간엔 당신의 온전한 기쁨이었을 나.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로부터 날 지키려 했던 당신. 하지만 엄마는 더 이상 강하지 않고 난 더 이상 그녀에게 둥근 행복이 아닐 것이다. 나 역시 엄마가 집에 오기만 기다리던 시절에 살고 있지 않다. 굽고 굽은 어깨를 하고 깡소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지친 얼굴을 오히려 자주 외면하니까.


시간이 흘러 내가 더 늙고 약해져 대추도 나의 외로움과 불안들을 눈치채게 된다면, 그때 대추는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내가 부모에게 그렇듯 말로 다할 수 없는 연민과 사랑, 동시에 어떤 굴레에 갇힌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까. 이날 대추는 다리가 아프다고 엄살 부리는 저를 안아주는 내게, "이모, 이모가 좋은 이유는 이모 냄새 때문이야"라며 또 하나의 비밀을 털어놨다. 내 품에 닿는 작은 온기 또한 언젠가는 아스라한 무언가로만 추억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뒤틀린 채 쌓아 올려진 시간의 끝에서도 지금 우리가 함께 공원을 걷고 있듯, 10년, 20년 뒤의 우리가 여전히 함께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의 틈에서 미워하는 말들이 툭툭 튀어나올지라도, 그저 이렇게.


이상하게 요즘은 사랑 노래를 들으면 연인보다는 부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요즘 즐겨 듣는 노래는 너드커넥션의 <우린 노래가 될까>다. 아주 아주 먼 훗날 우리가 헤어져 기억에만 의존해 서로를 떠올려야 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어떤 식으로 추억하게 될까. "모든 걸 기어이 붙들고 영원히 간직한다면, 그 모든 말들과 약속들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면, 우린 노래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될 수 있겠지. 그리고 그건 구질스럽고 추레한 말들로 쓰인 가장 애틋한 사랑 노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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