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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Jun 12. 2023

듣는 마음, 읽는 마음

중국에 갔던 L이 오래간만에 전해온 소식은 그가 최근 한국에 돌아와 새 노래를 만들었단 거였다. 엔터 회사에서 음악을 만들던 L은 1년 전 중국에서 일하게 됐다며 회사도 관두고 짐을 싸 떠났다. 그때만 해도 3년을 내다보던 차이나 라이프가 어쩌다 1년 만에 끝나게 됐는지 자세한 사정을 캐묻진 않았다. 마냥 잘 된 일은 아니리라, 지난 대화를 곱씹으며 짐작할 뿐이었다. 어쨌든 서울에서 L을 다시 볼 수 있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는 사실 뒤에 숨는다면 당분간은 그가 돌아온 걸 속없이 환영해도 될 것 같았다.


L은 자기가 만든 노래라면서 유튜브 링크를 보내줬다. 우리가 친해진 후 그가 새로운 노래를 만든 적은 없고 옛날에 만든 노래에 대해선 내가 굳이 캐묻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처음 들어보는 그의 노래였다. 희망찬 표정을 한 소년들이 경쾌한 춤을 추며 젊음과 사랑을 노래하는 곡이었다. 남자아이돌의 음악을 듣지 않는 내 귀에도 아주 근사하게 느껴졌다. 뉴진스와 아이브를 밀어내고 그날의 노동요 플리를 독차지했을 정도로.


L의 친구인 내겐 이 곡이 처음 보는 남돌이 아닌 L의 노래처럼 느껴졌기에 종일 노래를 들으면서 어쩐지 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대중가요보다 인디씬에 어울릴 법한, 수줍고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 그가 이런 노래를 만들 걸 상상하니 좀 이상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 L도 춤추고 싶은 기분을 느꼈을까 궁금해졌다. 왠지 안 그랬을 것 같았다. 인상 쓰고 한숨 푹푹 쉬면서 일했겠지. L이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L에 대해 생각하는 건 또 다른 의미에서 좀 특별한 일이기도 했다. 최근 나는 내 이야기를 토해내느라 바빴다. 회사에서 글을 쓰고,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다른 여러 일들로 글을 쓰고, 브런치에다가도 이렇게 글을 쓴다. 감상이든 생각이든 느낌이든 모두 내가 가진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이긴 매한가지였다. 처음에는 미친듯한 생산성으로 창작을 해대는 내가 약간 대견했는데 지금은 답답하다. 무슨 글을 쓰던 좁디좁은 세계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듣지 않고 읽지 않고 내 얘기만 해대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감이 바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틈이 없다는 건 사실 핑계가 아닐까? 그저 그럴 능력이 부족한 걸지도. 가진 모든 걸 쥐어짜듯 글을 쓰고 녹초가 된 몸으로 드러누운 어느 밤 유희경 시인의 말에 뜨끔한 적이 있다. "쓰기는 본능이고 읽기는 의지입니다. 쓰려는 이는 많고 읽으려는 이는 없는 현상은 이를 통해 이해됩니다." 본능만 있고 의지는 없는 삶. 이 말을 빌리면 그런 동물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게 나였다.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사람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러고 있었다. L의 노래에 유난히 귀 기울이게 된 것도 얼마간은 시인의 말을 읽고 난 뒤 반성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됐었다.


반성하는 마음이든 L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마음이든 분명한 건 그가 만든 노래가 종일 날 들뜨게 할 만큼 멋졌다는 것. 생전 듣지 않던 새로운 가수의 노래로 노동요 플레이리스트든 나의 음악 세계든 한 뼘쯤 더 확장될 수 있었다는 것. 사실 이런 건 다 필요 없고, L이 만든 노래를 들으면서 그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는 것. 모든 타인은 읽히길 기다리는 텍스트. 많이 듣고 많이 읽자고, 섬처럼 떨어진 무수한 우주를 이해하고 사랑하자고, 쓰는 것보다도 그게 먼저라고, 그렇게 순서를 정하기로 했다. 그건 너무 많은 말을 하다가 지쳐버린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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