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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Jun 18. 2023

우리를 우리이도록 만드는 것

그 시절 내가 좋아한 선배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난 회사가 좋다.


같이 야근한 선배들과 맥주를 마시러 나란히 걷는데 이런 생각이 들어 소름 돋았다. 이걸 극구 부인하고 싶었던 이유는 세상 모든 내 조직이 그렇듯 우리 조직 돌아가는 꼴도 후진 구멍가게 같기 때문이고 소름이 돋은 이유는 동료들과 모이기만 하면 회사 욕을 하는 사람이 또한 나이기 때문이다. 술도 아직 안 마셨는데 왜 이러는 거야. 난 회사를 싫어해, 싫어한다고!


낮 동안 세상이 떠내려갈 듯 퍼부은 소나기 때문인지 저물녘 하늘이 유난히 아름다운 날이었다. 보랏빛으로 쪽빛으로 분홍빛으로 번지는 노을은 우주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었고 하나 둘 켜지는 가로등 불빛은 어둠을 선명하게 가르며 퇴근길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 축축한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풀 냄새 따위가 이곳을 내가 아는 광화문이 아닌 곳처럼 느껴지게도 했다.


누그러진 표정의 어른들이 헤프게 웃고 떠들고 빈틈을 잔뜩 보이면서 걷는 광경을 난 좋아한다. 마법 같은 하늘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날 퇴근길 맥주 한 잔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린애 같았다. 모든 근심걱정을 내일로 미뤄둔 듯했고 초여름 밤 선선한 공기에 모처럼 들뜬 것처럼도 보였다.


그중에서도 내 선배들이 특히 그래 보였다. 한 선배는 하이볼에서 나온 레몬씨를 발아시켜 레몬나무를 키우고 있다며 집에서 끝없이 하이볼을 말아먹을 날이 머지않다고 자랑했다. 한 열 번은 들은 자랑이었다. 다른 선배는 의지한 적 없으나 40대의 나이에 결혼하지 못한 또 다른 선배에게 소개팅을 하라면서 잔소리를 했고 구박을 당한 선배는 무언가 항변을 시도했지만 매번 맥아리 없이 가로막혔다. 그러니까 그 선배들은 한참 후배인 내 앞에서 주름잡을 생각도 안 하고 투닥거리고 있는 거였다. 쫓기는 일도 없는데 광화문 직장인답게 휘적휘적 성급히 걸으면서 그 모든 유치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도 "얘 어디 갔냐"며 뒤돌아 다리가 제일 짧은 날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이 선배들이 좋다. 맨날 술 취해 돌아다니면서 일할 때는 무섭게 꼼꼼한 점이 좋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점점 사회적 인정을 잃어가고 있지만, 그래서 너는 더 늦기 전에 회사 나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점도 바보 같지만 좋다. 갈 데가 없어서 못 나갔다는 선배들 말을 난 별로 믿지 않는다. 선배들은 계산에 밝은 사람들이 아니다. 여기서 하는 일 좋아하니까. 여기 사람들 좋아하니까. 그러니 능력에 비해 터무니없는 조직 내외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냥 묵묵히 하던 일 하는 걸 거다.


돈도 별로 못 벌면서 맨날 맛있는 거 사주고 후배랍시고 챙겨주는 게 제일 좋다. 어쩌다 같은 회사에 다니게 된 사이일 뿐인데 이 선배들은 후배가 뭐라고 이렇게 뻐할까? 후배들이랑 별로 안 친한 나는 늘 그게 궁금했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본다. 언젠가 정말 회사를 나가게 된다면 그때도 이 선배들과 지금처럼 웃고 떠들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우리를 우리이게 만드는 무언가는 이미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하나의 시절을 함께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그러면서 함께 느끼는 공통의 감정 같은 것들 말이다.


언젠가는 지나가기 마련인 한때, 그날이 오면 우리 사이에 맴도는 온도도 지금과는 사뭇 달라지겠지. 어쩌다 만나더라도 돌아오지 않는 어떤 시절을 끝없이 추억하기만 하겠지. 선배들이 뭐라고 아직 오지 않은 때를 벌써 안타까워하는 건 역시 내가 이 선배들에게 너무나 깊은 애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선배들은 "나중에 내 탓하지 말고 얼른 회사 때려치워 살 길 찾아라!"라고 할 것 같다. 디스크로 꼼짝 못 하는 목으로 늦은 시간까지 일하면서. 아아. 이 순하고 바보 같고 성실한 사람들 때문에 당분간은 정말 회사 못 그만두겠다.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 뱅글 돌아가는 이 조직의 후짐도 이 선배들을 생각하면 아주 조금은 정이 간다. 이런 선배들을 만나 이런 시절을 보내게 해 준 것만으로 이 회사에는 빚을 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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