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시 Aug 14. 2023

다음엔 뭐 하고 놀지?

태풍이 훑고 지나간 대지엔 어느새 여름의 기운이 가시고 그늘진 길목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가을에 태어나 가을을 가장 좋아하는 나의 역법은 마지막 복날을 기다려 가을의 시작이라고 하므로, 오늘 난 찌는 듯한 한낮의 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우수에 젖어 하루를 보냈다. 가을이 온다… 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구나…쓸쓸한 기분… (따뜻한 커피를 호로록).


예년 같았으면 여름이 저물고 있음을 두 팔 벌려 환영할 텐데. 올해는 이상하지, 가을이 온다는 기쁨과 별개로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바다를 닮은 파란 하늘과 탐스러운 요술램프처럼 생긴 흰 구름을 더는 볼 수 없어서? 나뭇잎의 녹빛과 그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의 채도가 어제와 같을 수 없어서? 한바탕 땀을 흘리고 돌아와 에어컨 아래서 청하는 낮잠의 달콤함을 다시 느낄 수 없어서? 아니다. 아무래도 좋을 그런 것보단 올해 여름을 제대로 치르지 않아서. 여름의 의식도 여름의 축제도 여름의 물놀이도 없이, 시원한 실내에서 계절을 잊은 채 지루하고 따분한 하루하루를 보내서. 이 기분의 이유란 아무래도 그래서일 것이다.


올해와 달리 작년 여름은 의식과 축제와 놀이로 충만했다. 엄연히 다른 행정구역(그것도 경기도와 서울…)에 살고 있지만 어쨌든 동네 이웃인 친구와 수박과 자두를 나눠먹었다. 제철 과일을 나눠먹으며 달고도 다정한 여름을 맞이하는 건 우리만의 의식. 그런데 2년째 계속된 이 의식의 명맥이 3년 차에 뚝 끊겨버린 거였다. 동네의 술집을 순회하며 토마토 하이볼을 마시는 대흥동 토마토 하이볼 축제에도 올해는 가지 못했다. 작년에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참여해 도장 6개를 제일 먼저 찍었는데… 영예의 1등을 차지하고 기념품도 받아갔는데… 그런데 올해는 1등은커녕 참가도 못 했다. 올해 1등에게는 행운의 버블건을 쏘아주면서 같이 축하해 준댔는데… 내가 그걸 맞으면서 모두의 부러움이 섞인 축하를 받았어야 했는데…


이뿐만이 아니다. 코타키나발루의 황홀한 석양 밑에서 제주의 에메랄드빛 바닷속에서 즐기던 여름 해수욕도 올해는 없었다. 해수욕은 둘째 치더라도 바다에 한 번도 가질 않았다. 한때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 훌쩍 잘도 떠났던 그 바다, 나에게 자연의 힘과 생명력, 그 안에 내 작은 몸을 맡기는 자유로움에 대해 알려준 그 바다에. 그 좋은 여름에 난 도대체 뭘 했던 걸까? 내가 정말 여름날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마치 봄을 건너 가을이 성큼 와버린 것만 같다.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뒤늦게 든다. 벌써부터 여름이 그리워진다.


한 계절을 온전히 맞이하는 일이란 제철음식과 과일을 나눠먹는 일. 그 계절에만 할 수 있는 의식과 축제와 놀이를 즐기고, 그 계절에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변화무쌍한 거리를 쏘다니는 일. 이런 일 없는 계절은 그저 기온 35도나 습도 90% 같은 재미없는 숫자들로 존재하는,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렇게는 여름을 보낼 수 없다. 그렇다면 뭐 하고 놀지? 여름이 손 닿지 않는 먼 곳으로 훌쩍 떠나버리기 전에 부지런히 이 계절을 껴안고 놀 궁리를 해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쓰는 사람의 자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