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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Apr 06. 2020

비빔밥의 본질에 관하여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비빔밥은 어떤 음식인가? 

비빔밥을 정확하게 설명한 이는, 엉뚱하게도,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년)이다. 백남준은, “한국일보” 1993년 7월 31일 자 신문에 “비빔밥 정신과 대전엑스포93”이란 글을 기고했다. 약 30년 전에 ‘비빔밥 정신’ ‘비빔밥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전략) 대전엑스포 현장을 거닐면서 절로 생각나는 것은 우리의 비빔밥 문화이다. 즉 정보량이 폭주하는 현대전자문명에서의 명쾌한 해답이 혼합매체(Mix Media)정신이다./우리나라는 멀티미디어에 자신을 가져도 됩니다. 비빔밥 정신이 바로 멀티미디어니까요. 한국인은 복잡한 상황을 적당히 말아서 잘 지탱하는 법을 알아요. 그 복잡한 상황이 비빔밥이지요. 프랑스 비평가 장 폴 파르지에도 한국의 또는 백남준의 심볼은 비빔밥이라고 말했지만, 우리나라에 비빔밥의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세계에서 뒤지지 않습니다. 비빔밥은 참여예술입니다. 다른 요리와 다르게 손수 섞어 먹는 것이 특색이니까요. 비빔밥 문화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안성맞춤이지요. 전자매체의 세계가 되어서 제일 덕보는 것이 아마 우리나라일 것입니다.     


‘혼합매체(Mix Media)’라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 재미있다. 1993년에는 ‘멀티미디어’라는 표현은 지금도 사용한다. 오래전에 백남준은 이런 표현으로 한국인과 비빔밥을 설명했다. 백남준은, 스스로, 자신의 예술을 비빔밥 예술이라고 했다. 프랑스인 ‘백남준 전문가’ 장 폴 파르지에(Jean-Paul Fargier)도 마찬가지. “한국, 백남준의 심볼은 비빔밥”이라고 했다.


비빔밥은 ‘멀티미디어’ ‘복잡한 상황을 적당히 말아서(섞어서) 지탱하는 음식’ ‘참여예술’ ‘손수 섞어 먹는 것’이라고 했다. “전자매체의 세계가 되어서 제일 덕보는 나라가 바로 (비빔밥의 나라) 한국”이라고 말한다. 

비빔밥은 멀티미디어다. 밥, 나물, 고기, 생선, 된장, 간장, 고추장이 하나의 그릇에서 뒤섞인다. 대부분 음식은 한가지 식재료에 소스를 더한다. 섞고 비비지 않는다. 스테이크는 고기를 구운 다음, 적절한 소스를 얹는다. 대부분 오븐 요리는 ‘식재료+양념’이다. 더하지만, 섞고 비비지는 않는다. 


불고기는 ‘고기의 비빔’ ‘비빔 고기’다. 쇠고기, 돼지고기에 양념을 섞고, 비비고, 재운다. 뒤섞고, 비비고, 때로는 손으로 주물럭거린다. 고기 문화가 앞선 유럽 음식도 우리 불고기처럼 손으로 주물럭거리거나 비비고, 뒤섞어서 만드는 일은 드물다. ‘비빔고기’는 없다.


백남준의 예술은 비빔, 섞임의 예술이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소리와 모습, 역사적 사실과 일상의 일들이 하나의 화면에서 뒤섞인다. 이질적인 여러 요소는 하나의 그릇 안에서 충돌하고 화합한다. 충돌과 화합은 ‘너와 나’의 화학적 반응을 불러온다. 여러 요소가 뒤섞여 충돌, 화합한다. 새로운, 제3의 요소가 탄생한다. 하나의 그릇 안에서 뒤엉켜 부딪힌다. 나물에 장의 맛이 배고, 밥 알갱이에 나물의 즙과 장의 맛이 뒤엉킨다. 융합이 일어난다. 융합의 영어 표현은 ‘convergence’ 혹은 ‘fusion’이다.      


백남준은 비빔밥을 ‘참여예술’이라 했다. ‘내’가 만드는 음식이다. 


봄철, 너른 들판이다. 모내기가 한창이다. 점심시간, 논 주인이 점심을 내온다. 광주리에는 이런저런 나물들을 무친 그릇들이 있다. 섞고, 비비고, 무친 것들이다. 일꾼들이 둘러앉아 큰 대접에 밥을 덜고, 나물을 자기 요량껏 퍼 담는다.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을 만큼 퍼 담는다. 누구도 밥의 양, 나물의 종류나 양을 정해주지 않는다. ‘내’가 정한다. “무나물이 맛있네. 무나물 많이 드세요” 정도다. 이것 먹지 마라, 저것 먹으라고 정해주지 않는다. 들판 비빔밥은 레시피가 없다. 백남준이 이야기한 ‘비빔밥=참여예술’이다. 레시피는 먹는 이가 정한다. ‘참여 음식’을 넘어서서 ‘자기 주도형 음식’이다. 이름은 모두 비빔밥이다. 같은 내용물로 각자 만들지만, 각각 다르다. 


스마트폰도 비빔밥이다. 같은 모델의 스마트폰이라도 ‘앱(APP. APPLICATION)’에 따라 달라진다. 기기는 그릇이고, 앱은 고명이다. 같은 스마트폰이라도 앱에 따라 ‘나만의 스마트폰’이 된다. 개방, 공유, 참여는 웹 2.0이다. 비빔밥도 마찬가지다. 자기 주도적으로 만든다. 웹 2.0의 세계를 넘어선다. 한국이 스마트폰 강국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빔밥의 기원을 두고, ‘병영’ ‘궁중의 연말 마지막 날 식사‘ ’제사‘ ‘들판’ 등등 이론이 많다. 모두 맞고, 모두 틀렸다. 비빔밥은 자연발생적인 음식이다. 어느 비빔밥집이 ‘가장 오래되었다’ 혹은 ‘시작’이라고 말한다. ‘비빔밥 상업화’의 시작이다. ‘비빔밥의 시작’은 아니다. 비빔밥은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다. ‘시의전서’의 ‘부븸밥’도 마찬가지. ‘골동반=부븸밥임을 표기한 첫 책자’라는 뜻이다. 별 의미는 없다. ‘부븸밥’은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다. 


조선 중기 문신 박동량(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비빔밥이 나타난다. 이름은 혼돈반(混沌飯)이다.       


“(전략) 자네 술은 얼마나 마시며, 밥은 얼마나 먹는가?” 하였다. 전임이 대답하기를, “오직 공께서 명하시는 대로 먹겠습니다.” 하니, 곧 밥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비빔밥과 같이 만들고 술 세 병들이나 되는 한 잔을 대접하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우고 단숨에 그 술을 들이켰다.(후략)     


“세상에서 말하는 비빔밥과 같이”의 원문은 ‘여속소위혼돈반(如俗所謂混沌飯)’이다. 한자 표기는 ‘混沌飯(혼돈반)’이지만, 저잣거리에서는 다르게 불렀을 것이다. 뜻은 ‘비빔밥’과 같았을 것이다. 비빔밥은, 이름이 무엇이었든, 박동량의 시대에 있었다. 글에 나오는 전임은 조선 전기의 무관이다. 15세기 후반의 전임은 ‘밥과 채소, 생선을 넣은 비빔밥’을 먹었다. 1900년 무렵 “시의전서”의 “골동반=부븸밥”은 별 의미가 없다. 


혼돈반(混沌飯)은 다른 기록에도 나타난다. 풍석 서유구(1764년~1845년)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도 비빔밥, 혼돈반은 나타난다. 풍석의 비빔밥. 혼돈반은 한자 표기가 다르다. ‘渾沌飯(혼돈반)’이다. “임원십육지”에는 ‘혼돈반방(渾沌飯方)’이 있다. ‘비빔밥 만드는 법’이다. 


풍석은 1806년부터 1842년까지 약 36년간, “임원경제지”를 집필했다. 19세기다. 전임은 15세기 후반 사람이고, 박동량은 17세기 초중반에 “기재잡기”를 남겼다. 


풍석은, 전임과 비교하면 약 400년 후의 사람이고, 박동량과 비교하면 200여 년 후를 살았다. 조선 전기, 중기까지 ‘비빔밥=혼돈반’이다. 조선 후기에는, “시의전서”의 ‘골동반=부븸밥’같이, ‘骨董飯(골동반)’으로 기록했다. 민간에서는 ‘부븸밥=비빔밥’으로 불렀을 것이다. 


비빔밥은 꾸준히 진화, 발전한다. 한식과 비빔밥의 특질이다. 식량이 부족하고 가난했던 조선 시대에는 색다른 비빔밥이 없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지 않다. 오주 이규경(1788~1856년)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화려한 비빔밥부터 소박한 비빔밥까지 여러 종류가 나타난다.      


비빔밥, 채소 비빔밥, 평양 것을 으뜸으로 친다. 다른 비빔밥으로는 갈치, 준치, 숭어 등에 겨자 장을 넣은 비빔밥, 구운 새끼 전어를 넣은 비빔밥, 큰 새우 말린 것, 작은 새우, 쌀새우를 넣은 비빔밥, 황주(황해도)의 작은 새우젓갈 비빔밥, 새우 알 비빔밥, 게장 비빔밥, 달래 비빔밥, 생호과 비빔밥, 기름 발라 구운 김 가루 비빔밥, 미초장 비빔밥, 볶은 콩 비빔밥 등이 있다. 사람들 모두 좋아하고 진미로 여긴다.       


채소 비빔밥은 지금 우리도 즐겨 먹는 것이다. 열무김치를 넣어도 좋고, 날 상추를 찢어 넣어도 좋다. 갈치, 준치, 숭어 등과 겨자 장을 넣은 것은 오늘날 회 비빔밥과 닮았다. 겨자 장 대신 초고추장이 달라졌다. 큰 새우, 작은 새우, 쌀새우, 새우젓갈, 새우알을 구분했다. 화려하다. 쌀새우는 ‘미하(米蝦)’다. 쌀알만큼 작은 것이라 붙인, 낭만적인 이름이다. 게장 비빔밥은 지금도 있다. 

비빔밥은 열려 있는 음식이다. 생선, 고기, 채소 등을 두루 사용한다. 날고기, 구운 고기, 익힌 고기, 날 채소와 데친 것, 구운 생선, 날생선을 가리지 않는다. 하나의 그릇 안에 밥, 장, 고명을 섞고 비빈다. 비비는 과정에서 마찰, 충동, 융합이 일어난다. 제3의 맛이 생긴다. 외국 음식에서는 보기 드물다. 


‘사단법인 아시아기자협회’ 2012년 7월 20일, ‘고선윤의 일본 이야기’ 중 일부다.     


(전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 친구들에게 비빔밥은 ‘어려운’ 음식이었다. (일본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비빔밥을 앞에 두고 상당히 어려워했다. (중략) 일본은 음식을 비빈다거나 섞는다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중략) 그들은 섞어서 먹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중략) 이전에 팥빙수 집을 같이 간 친구 하나는 “이렇게 맛있게 보이는 음식을 왜 그렇게 망가뜨려서 먹느냐”고 질책을 했다. 


산케이신문 서울특파원 구로다 씨의 ‘비빔밥=양두구육의 음식’과 다르지 않다. 가마메시[釜飯, 부반]의 시각으로 비빔밥을 본다. 일본인에게 비빔밥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음식이다. 섞고 비비면 “음식을 망가뜨린다”고 여긴다. 유럽이나 다른 나라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다시, 백남준이다. 1993년 한국일보 기고문 중 일부다.      

“각 소재의 특징을 살려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일본 음식 문화에 비해 우리 요리상은 모든 반찬이 한꺼번에 나오는 반대의 방식이다. 먹는 사람의 기호 입맛에 따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마치 금세기말의 컴퓨터 전문화를 예견한 무작위접근(Random Access) 방식이다.”     


비빔밥은, “먹는 사람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무작위접근방식, 자기 주도형 음식”이다. 백남준, 장 폴 파르지에가 말하는 한식, 비빔밥의 본질을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익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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