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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Apr 13. 2020

미나리, 한낱 풀이 아니다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한낱 ‘풀’이라고 허투루 볼 일은 아니다. 미나리 이야기다. 


미나리는 습한 땅, 마른 땅을 가리지 않는다. 한겨울만 아니면 전국 아무 곳에서나 자란다. 흔하면, 흔히, 천하게 여긴다. 미나리, 흔하되, 천하지 않다. ‘미나리의 의미’는 깊고 무겁다. 천 년을 훨씬 넘기는 긴 세월이다.  

"거칠고 나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미나리는 우리나라가 사랑하는 식재료 중 하나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1년(1465년) 5월10일의 기사다. 제목은 “침장고(沈藏庫)와 사옹방(司饔房)의 관리를 추국케 하다”다. 

침장고는 여러 종류의 장기보관 식재료를 관리한다. 김치, 장아찌를 포함하여 여러 종류의 장기보관 식재료를 관리한다. 사옹방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모든 식재료를 관리한다. 이날 기록에는, 얼핏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숱하다. ‘사건’의 중심에 ‘미나리’가 있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침장고(沈藏庫)의 관리(官吏)가 바친 채소(菜蔬)는 지극히 거칠고 나쁜 데다 또 몸소 친히 바치지 않았으며, 사옹방(司饔房)의 관리와 환관(宦官)들도 또한 검거(檢擧)하지 아니하여 모두 마땅하지 못하니, 추국(推鞫)하여 아뢰라.” 하였다. 처음에 세자궁(世子宮) 앞에 미나리[芹]를 심은 것이 심히 아름다워서 바치게 하였었는데, (중략) 심히 억세고 나쁜 것이었다. (중략) “채과(菜果)는 작은 물건이다. 그러나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알고, 은미한 것으로부터 현저한 것을 아는 것이 성인(聖人)이 근신함이다. 침장고(沈藏庫)의 관리가 채소 기르는 데에 실수한 것은 진실로 작은 죄가 되나, 임금에게 바치는 것에 이르러서도 친히 감독하여 올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청하고 발로 차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그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이미 조짐이 있는 것이니, 그들을 속히 국문(鞫問)하여 아뢰어라.” 하고, 또 사옹 제조(司饔提調)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ㆍ영가군(永嘉君) 권경(權擎)ㆍ침장고 제조(沈藏庫提調) 이서(李墅) 등을 불러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책문(責問)하게 하고, 마침내 침장고 별좌(沈藏庫別坐) 오형(吳滎)ㆍ권선(權善)은 장(杖) 70대를, 김종직(金從直)은 1백 대, (중략) 침장고 별좌(沈藏庫別坐) 김회보(金懷寶), 사옹 별좌(司饔別坐) 이중련(李仲連)ㆍ조금(趙嶔) 등은 파직(罷職)하고, 환관(宦官) 김눌(金訥)은 본읍(本邑)에 충군(充軍)하라.     


그까짓 미나리로 왜 이런 법석을 떠는가, 싶다. 내용은 간단하다. 세자궁 앞에 심은 미나리가 아주 좋았다. 나중에 받아보니, 나빴다. 미나리 관리 소홀이다. 결국, 세조가 크게 화를 낸다. 미나리를 키우고, 관리, 보관한 침장고, 사옹원 관리들이 무거운 벌을 받았다. 


기사의 첫머리에 ‘의금부(義禁府)’가 등장한다. 미나리와 의금부? 엉뚱하다.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이다. 고급 관리들의 죄를 다스리는 곳은 사헌부다. 오늘날 검찰과 감사원의 기능을 섞은 곳이다. 이외에도 포도청, 형조가 있다. 


의금부는 ‘국왕 직속 사법기관’이다. 왕의 명령에 따라, 무소불위로 사법관을 행사한다. 의금부는 주로 대역 죄인을 다스린다. 대역죄는 역모, 반란 등이다. 왕권 도전이다. 의금부가 ‘미나리 관리 소홀’에 대한 죄를 묻는다? 미나리와 대역죄? 아귀가 맞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도 심상치 않다. 이 정도로 큰 죄, 처벌이라면, 앞 뒷날의 기록에 연관 내용이 나타난다. 처벌을 두고, 왕과 신하들의 의견, 주장, 반론이 치열하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생뚱맞게 단 하루, 한 번의 기록이 그만이다. 토론, 반론도 없이 종결된 희한한 사건이다. 왕실 종친들까지 벌을 받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옹제조 청성위 심안의(1438~1476년)는 세종대왕의 차녀 정안옹주의 남편이다. 세조와는 처남, 매부 사이. 침장고 제조 이서(1429~1481년)는 효령대군의 사위다. 세조와는 사촌 처남, 매부 사이다. 두 사람 모두 부마(駙馬)다. 그까짓 미나리로, 부마들이 벼슬살이에 오점을 찍었다. 


5품직인 침장고 별좌(別坐) 오형, 권선은 장 70대, 김종직은 장 100대. 가볍지 않다. 침장고 별좌 김회보 등 세 명은 파직. 환관(내시) 김눌은 군대로 끌려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미나리가 단순한 나물이 아니고 ‘충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근훤(芹暄)’은 ‘미나리’(芹, 근)와 ‘따뜻한 햇볕’(暄, 훤)이다. 근훤은 “열자 양주(列子 楊朱)”에서 시작된다.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의 농부가 미나리를 먹어보니 맛있었다. 농부는 지역 세력자에게 미나리를 바쳤다. 마찬가지, 봄볕이 따뜻하자 “따사로운 햇볕을 임금에게 보내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근훤’, 미나리와 따뜻한 햇볕은 충성의 상징이다. ‘농부가 미나리를 바친 것’은 ‘헌근(獻芹)’이다. 소박하고 볼품없는, 그러나 마음을 가득 담아 바치는 선물, 정성이 바로 ‘헌근지성(獻芹之誠)’이다. 헌근, 헌근지성은 충성이다.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미나리, 헌근에 대한 기록은 한반도에서도 흔했다. ‘중국 유학생, 영주권자’였던 고운 최치원(857~908년)의 “계원필경”에 헌근이 등장하고, 고려 말기 이곡(1298~1351)의 문집 “가정집_잡록”에도 미나리가 있다. 시의 제목은 “‘시경’의 구절을 뽑아서 가정(稼亭)에 제하다”이다.       


더부룩이 다북쑥 벽옹에 가득하고/미나리며 마름풀 반수에 넘치나니/많고 많은 상서로운 인재들이여/모두 임금님이 등용할 만하다네


‘미나리=충성’의 이미지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다. 


조선 시대 성균관이나 중국의 태학 등이 ‘미나리=충성’을 드러낸다. 태학, 성균관에서 공부한 이들은 국가의 주요한 재원, 관리가 되었다. 관리들의 덕목은 국가, 군왕에 대한 ‘충성’이다. 교육 기관에 미나리를 심었던 이유다. 건물 이름에도 ‘미나리[芹]’를 널리 사용했다. ’미나리 심은 궁전, 근궁(芹宮)‘이다. “시경”에는 “즐거워라. 반궁(泮宮)의 물가에서 미나리를 캐노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도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반궁에서 미나리 캐던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반궁은 반수(泮水)에 둘러싸였다. 반수는, 미나리를 키우는 물웅덩이다. 태학, 대학, 국학, 성균관은 물길로 담장을 둘렀다. 반수다. 반궁에는 미나리가 자라니, 곧 근궁이다. 반궁, 근궁에서, 미나리를 캤다는 것은 곧 “내가 최고의 교육 기관에서 공부했다”는 뜻이다. 관리, 사대부들은 자연스럽게 ‘미나리=충성’을 시로 읊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널리, 미나리를 심고 먹었다. 꼼꼼한 중국 사신의 눈에도 조선 사람들의 미나리 선호는 유별났다.

조선 후기에는 미나리가 상업, 실질적으로 변한다. 상업적으로 널리 재배, 거래된다. 돈을 벌 수 있는 나물로서의 미나리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차례 미나리를 이야기한다. 세금 제도를 논하는 “경세유표”의 미나리다(경세유표_제8권_지관수제_전제 10).      


(전략) 미나리[芹]를 심은 것과 세모골[三脊蒲]을 심은 것은 아울러 제 1등 율(率)에 따르고 부거(芙蕖 :연)를 심은 것은 제 5등 율을 따라서 그 조속을 거둔다.     
생각건대, 세모골(왕골)이라는 것은 돗자리를 짜는 데 쓰인다. (중략) 미나리와 이 풀은 이익이 벼와 비교해서 두어 갑절이니, 상지상으로 세를 논함이 마땅하며, 부거(芙蕖)를 심은 것은 그 연밥을 수확해서 또한 벼보다 이익이 많으므로 중지중의 세로 논하는 것이다. (후략)     


‘상지상(上之上)’ ‘중지중(中之中)’ 등은 세율이다. 모두 아홉 등급이다. 기준은 ‘벼’다. 이익이 벼농사보다 큰가, 작은가를 따진다. 미나리는 벼보다 몇 곱절의 이익이 난다. 소득이 높으니 세금도 많이 낸다. 미나리는 최고 세율, 상지상이다. 미나리 재배를 통한 수확, 소득은 상당히 높았다. 제 1등의 ‘율(세율)’이다. 


다산은, 1801년 11월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다. 18년간 유배 생활의 시작이다. 재미있는 것은 강진 유배 시절 만난 미나리다. “다산시문집_제5권_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의 한 부분이다. 

     

사랑채 아래 새로이 세금 없는 밭을 일궈/층층이 가는 돌 깔고 샘물을 가두었지/올해에야 처음으로 미나리 심는 법 배워/성안에 가서 채소 사는 돈이 들지 않는다네     

소득이 있으면 세금이 있다. “경세유표”에서도 미나리는 상지상의 세금을 걷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산은, 사랑채 아래 작은 텃밭을 일구었다. 작은 텃밭,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강진 유배 시절이니, ‘성안’은 강진성이었을 것이다. 작은 시골 성안에서도 이미 미나리를 팔고 있었다. 텃밭도 없으면 꼼짝없이 미나리를 돈 주고 사야 한다. 미나리는, “경세유표”에서 이야기하듯이, 세금을 무겁게 물어야 하는 환금작물이었다. 당상관 벼슬을 지냈고 국왕의 총애를 받았던 이다. 유배지에서 미나리를 직접 심고, 가꾸는 모습이 아련하다. 


미나리는 늘 우리 가까이 있었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총애했다. 민심은 달랐다. 항간에 노래가 퍼졌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 미나리는 볼품없지만, 늘 곁에 있는 인현왕후고, 장다리는 장씨 성을 가진 장희빈이다. 장다리는 꽃이 아름답지만 한 철일 뿐이다. 충성의 상징인 미나리지만, 우리 선조들은 미나리를 늘 곁에 있는 실용적인 나물로 여겼다. 


‘조선사람들의 미나리 선호’는 외국인들에게도 특이하게 보였다. 성종 시대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을 찾았던 동월(董越, 1430~1502년)은 검소하고, 꼼꼼한 원칙주의자였다. 사신으로 오기 전, 사전 조사를 통하여 조선의 인물, 지리에 대해서도 밝았다. 동월이 남긴 “조선부” “조선잡지” 등에 미나리가 나온다. “조선인은 왕도(한양)와 개성 민가에 있는 작은 연못에 미나리를 심었다”고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널리, 미나리를 심고 먹었다. 꼼꼼한 중국 사신의 눈에도 조선사람들의 미나리 선호는 유별났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익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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