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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Apr 20. 2020

복어에 대한 미신은 넓고 깊다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복어에 대한 ‘미신(迷信)’은 넓고 깊다. 

잘못된 믿음이다. 빌미는 중국 송나라 대문호 소동파(1037~1101년)다.


소동파가, 복어는 ‘죽음과도 바꿀 만한 맛’이라고 했다.
생선 중 최고의 진미는 복어다.
그중에서도 복어 회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소동파가 복어를 최고의 진미로 이야기했을까? 그중에서도 복어 회를 최고의 진미로 손꼽았을까? 사람의 목숨과도 바꿀 만큼 맛있는 생선이 있을까? 또 하나. 소동파는 복어, 복어 회의 계절은 봄철이라고 했다. 복사꽃(복숭아꽃)이 봄의 강물에 떠내려올 때가 바로 복어 철이라고 했으니, 복어의 계절은 봄철이다? 그렇지도 않다. 


복어를 먹고 사달이 난다. 독이 묻은 복어알을 먹었다가 중독, 죽거나 가까스로 살아나는 이들이 있다. 복어는 죽음과도 바꿀 맛? 희한한 이야기가 떠돈다.

 

잘못된 정보이거나 와전된 것이다. 엉터리다. 소동파가 복어를 맛있는 생선으로 여긴 것은 사실이다. 소동파의 시(소동파 시집_권 26)에 “물쑥은 땅에 가득하고 갈대 싹은 짤막하니, 지금이 바로 ‘하돈’이 올라오려는 때로다 [正是河豚欲上時, 정시하돈욕상시]”라는 구절이 있다. 제목은, ‘혜숭춘강만경(惠崇春江晩景)’. 물쑥이 가득하고, 갈대 싹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은 봄철이다. 소동파가 복어는 맛있는 생선이고, 봄철이 제철이라고 했다.  


이게 바로 복어에 대한 잘못된 믿음의 시작이다. 


소동파(蘇東坡)는 호가 동파(東坡)이고, 본명은 소식(蘇軾)이다. 쓰촨성[四川省] 출신. 내륙 깊은 곳이다. 한때 하이난[海南]에서 귀양살이한 적은 있지만, 생애 대부분을 내륙에서 보냈다. 신선한 바다 생선을 보기 힘들었다. 11, 12세기의 중국, 바다 어업도 발달하지 않았을 때다. 바다 생선 맛을 제대로 알았을 리 없다. 


소동파의 시대,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복어를 잡았다. 4, 5월 복사꽃이 필 무렵, 복어는 산란을 위하여 내륙의 강으로 올라온다. 황복은 산란기 복어의 배가 노랗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소동파가 만났던 그 복어다. 복어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위 소동파의 시의 ‘하돈(河豚)’이 복어다. 하돈은 ‘강에 사는, 돼지같이 생긴 생선’이다. 복어가 배에 바람을 넣으면 볼록하고 마치 돼지같이 뚱뚱해진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다. 민물 생선은 바다 생선의 감칠맛과 깊은 맛을 따라가지 못한다. 내륙 출신의 소동파가 맛본 바다 생선 종류도 그리 많지 않았을 터이다. 민물인 강에서 잡은 복어가 유달리 맛있었다. 바다 생선이면서 민물에서 잡는다. 특이하다. 


소동파가 처음 복어를 노래한 것도 아니다. 소동파 이전에도 진미 복어를 이야기한 이들이 있었다. 매요신(梅堯臣, 1002~1060년)은 소동파의 앞 시대를 살았다. 그도 복어 찬사를 시구로 남겼다. 시 제목은 “범요주좌중객어식하돈어(范饒州坐中客語食河豚魚)”다. 제목의 ‘요주’는 지금의 강서성 상요시(江西省 上饒市)다. 중국 남방이다.      


봄 물가에 갈대 싹 나오고, 봄 언덕에 버들개지 난다/
하돈이 이때를 만나면, 귀하기가 생선, 새우에 비교하랴?
[河豚當是時, 貴不數魚鰕, 하돈당시시, 귀불수어하] (하략)  


복어는, 생선이나 맛있는 새우보다 귀하다. 매요신은 복어가 맛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식용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요리 과정에 조금만 실수를 하면 목구멍에 칼을 넣는다”라고 했다. 이른바 ‘복어=죽음과 바꿀 맛’이다. 


‘복어=죽음과 바꿀 맛’은 소동파가 시작한 것도, 전매특허도 아니다. 소동파 이전부터 ‘복어=죽음과 바꿀 맛’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매요신의 시대에도 널리 퍼졌던 이야기다. 매요신의 뒤 시대 사람인 소동파가 빌려 쓴 것이다. 소동파는 최고의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유명한 시인이 이야기했으니 복어는 맛있는 천하의 진미가 되었다.  


‘봄철=복어 계절’이라는 내용도 엉터리다. 대부분 복어는 겨울이 제철이다. 참복(자주복), 밀복은 대표적인 겨울 생선이다. 봄에는 오히려 사라진다. 한반도에서 많이 생산되는 까치복은 1년 내내 고르게 생산된다. 봄이 제철인 복어는 드물다. 


왜 ‘복숭아꽃 필 무렵의 복어가 진미’라고 이야기했을까? 간단하다. 봄철에야 복어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복어는 깊은 바다에서 산다. 알을 낳기 위하여 봄철 강물에 나타난다. 어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성긴 그물과 무동력선으로 잡기는 힘들다. 강으로 온 복어를 겨우 잡는다. 이때가 봄철이다. 바다 생선인 복어를 ‘강의 돼지같이 생긴 생선’ ‘하돈’이라고 부른 이유다. 몇몇 기록에는 복어를 두고 강에서 사는 생선이라고 했다. 봄철 강물에서 잡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 터이다. 강에 사는 복어는 없다. 산란기에 잠깐 나타난다. 


복어에 대한 환상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도 오랫동안 복어를 먹었다. 복어는 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오래전부터 알았다. 남해안 일대의 조개무덤에서도 복어 뼈는 발견된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복요리를 본떠 우리의 복요리가 시작되었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일본의 복어 음식이 발달했음은 사실이다. 복어를 먹지 않았던 우리 민족이 일본을 본떠 복어를 먹기 시작했을까? 그렇진 않다. 우리도 일제강점기 이전 복요리가 널리 퍼졌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성종 24년(1493년) 4월, 경상도 관찰사 이계남이 조정에 보고한다. 내용은 ‘어촌 집단 사망’이다. 웅천(지금의 진해) 사는 공약명 등 24명이 굴과 생미역을 먹고 죽었다. 관찰사 이계남은, “해물 채취를 전면 금지하겠다”라고 보고한다. 


재미있는 것은 중앙정부의 판단이다. “사람이 굴과 생미역을 먹고 죽는 일은 없다. 반드시 복어[河豚]를 먹었을 것이다.” 왜 굴과 미역을 먹고 사람이 죽었을까? “복어가 굴에 알을 낳기 때문입니다. 이걸 먹었을 겁니다. 해물 채취를 금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 시대 초기에 이미 복어, 독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다. 


조선 후기 문신 죽석관 서영보(1759~1816년)는 “죽석관유집”에서 “복사꽃이 무수한 계절에 미나리, 참깨 맛이 그리워라. 이제 복어 계절을 또 보낸다”라고 아쉬워했다. 죽석관의 복어는 ‘복사꽃’ 등이 소동파의 시와 닮았다. 조선 시대 문인, 관리들은 소동파의 시를 보면서 공부를 한 이들이다. 복어에 대해서도 소동파의 표현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모든 문인, 관료들이 복어를 즐기는 복어 마니아는 아니었다. 숙종 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은 소론의 지도자였다. 그는 “예기유편(禮記類編, 1693년)”을 지었는데, 이 책이 소론과 노론 사이 심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엎친 데 덮쳤다. “예기유편”으로 조정이 시끄러운데 하필이면 최석정이 복어를 먹고 중독이 되었다. 최석정과 더불어 같은 소론계였던 남구만의 안타까운 ‘한탄’이 남아 있다. 


세상에 쓸 책도 많은데 하필이면 ‘예기유편’이고,
세상에 먹을 것도 참 많은데 하필이면 복어인가?


복어가 맛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모든 사람이 복어를 기필코(?) 먹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청장관 이덕무(1741~1793년)는 복어 먹는 것을 말렸다. 앞의 매요신도 “복어는 맛있긴 하지만 자칫 요리 과정에 실수가 있으면 죽는다. 마치, 목구멍에 칼을 넣는 것 같다”라고 했다. 청장관도 마찬가지다. 복어 먹는 일을 두고, “어쩌자고 독물을 삼켜서, 가슴에다 창칼을 묻으려 하는가?”라고 되묻는다. 


청장관의 조부 강계부사 이필익도 마찬가지다. 이필익은 후손들에게 유훈을 남겼는데 그중 일부분이 “백운대(白雲臺)에 오르지 말고, 하돈탕(河豚湯)을 먹지 마라”는 것이었다. 백운대는 위험한 곳이고 하돈탕, 복어탕은 위험한 음식이다. 이런 위험한 것은 애당초 피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복어를 먹었지만 ‘죽음과도 맞바꿀 맛’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왜 복어는 ‘죽음과도 맞바꿀 맛’ 혹은 천하의 진미라는 칭송을 듣게 되었을까? 복어에 대한 과장된 표현은 일본에서 시작된다. 


우리와 달리 일본은 도쿠가와막부 말기까지도 복어 식용을 공식적으로 금했다. 일본 역시 인명사고가 잦았다. 복어는 피해야 할 음식이었다. 


복어가 공식적으로 식용화된 것은 바쿠후 말기였다. 복어 명산지는 시모노세키. 지금도 복어를 이용한 음식, 음식점은 시모노세키가 유명하다. 이토 히로부미(1841~1909년)는 시모노세키가 속한 죠슈 번 출신이다 [長州藩 周防國村, 지금의 야마구치 현]. 이토는 복어 마니아였다.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중앙 정계로 진출한 죠슈 번 출신의 정치가, 군인들이 일본 전역으로 복어 식용을 퍼뜨렸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이토는 한일병합의 원흉이다. 병합 후에는 한반도에 통감으로 부임했다. 복어 음식에 대한 과장된 표현, 신화는 일제강점기 일본 메이지유신 주역들을 통하여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먼저 말한 매요신 등은 사라지고, 대문호 소동파의 이야기만 남았다. 


일본에서는 꾸준히 ‘복어 찬미’가 이어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일본 미식가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 1883~1959년)이다. 로산진은 “복어 먹다 죽는 게 의미 없이 사는 것보다 낫다” “시모노세키 복어가 가장 맛있다” “독이 무서워 복요리를 못 먹게 하는 것은 엉터리”라는 말도 남겼다. 


복어 식용을 금지했던 일본 에도[江戶] 시대, 하이쿠 시인이었던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763~1828년]도 마찬가지. “(복어 독이 무서워) 복어를 먹지 않는 바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후지산”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일본인들에게 후지산은 최고의 명산이다. 복어를 먹지 않는 ‘바보’들은 명산도 제대로 보고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복어를 먹었지만 죽음과도 맞바꿀 맛이라 여기지 않았다. 복어에 대한 과장된 표현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복어 전문 조리사 자격증’을 처음 만든 것도 일본이다. 우리도 일본의 예를 보고 복어 조리사 자격증을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복어 조리 자격시험을 치르는 나라는 많지 않다. 


교산 허균(1569~1618년)은 복어에 대해서 담담하게 기술한다. 


한강에서 나는 것이 맛이 좋은데 독이 있어 사람이 많이 죽는다.
영동(嶺東) 지방의 복어는 맛이 조금 떨어지지만, 독은 없다


동해안 산 복어가 독이 없다는 말도 믿기 어렵다. 산란기, 한강 유역으로 오는 복어는 알이 가득하고, 독성이 강하다. 동해안 산 복어는 한강 복어보다는 독이 약했을 것이다. 추정이다. 근거는 없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2017), <한국 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익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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