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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May 31. 2020

냉면은 언제나 냉면일 뿐이었다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평양냉면’은 고유명사다. 일반적으로 널리 쓰는 고유명사다. 언제부터 평양냉면이었을까? 평양냉면은 어떤 음식인가? 국수를 물에 말아 먹으면 평양냉면인가? 

그렇지 않다. ‘함흥 물냉면’도 있다. 메밀을 사용하면 평양냉면인가? 메밀 함량이 몇 퍼센트이면 평양냉면인가? ‘슴슴한’ 맛, 세 번을 먹으면 맛을 알 수 있는 음식? 여러 주장이 있지만 평양냉면을 정의하기는 만만치 않다. 육수는? 더 어렵다. 꿩고기, 닭고기, 동치미, 쇠고기, 돼지고기? 어느 것 하나 정확하게 평양냉면을 정의하지 않는다. 평양 ‘옥류관’의 냉면이 정통 평양냉면일까? 그렇지도 않다. 옥류관 냉면도 10~20년 사이 달라졌다. 어느 것이 정통 ‘옥류관’ 평양냉면인가? 


서울의 유명한 평양냉면 노포에서 혼자 평양냉면을 먹었던 적이 있다. 복잡한 점심시간. 종업원이 “괜찮으시면 합석?”이라고 권했다. 연세든 노인과 합석을 했다. 여든에 가까운 분이 맞은 편에 앉았다. 냉면을 기다리고, 먹으면서, 앞자리 노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열 살 남짓 어린 나이에 부모님 손 잡고 월남한 분. 고향은 평양이었다. 열 살 남짓까지 평양에서 살았다. 노인은 한국전쟁 전, 평양의 ‘냉면집 막내아들’이었다. 


형들이 있었어. 옛날 중학교 다녔거든. 아버지가 냉면집을 했어. 방학 때가 되면 형들이 산으로 꿩 잡으러 다녔어. 나도 따라다녔지. 고저, 냉면은 말이야 꿩고기를 넣은 게 진짜야. 대전에서 꿩고기 들어간 냉면을 먹어봤어. 예전에는 동대문 부근에 꿩고기 냉면 파는 집이 있었어.


노인의 ‘확신’을 두고,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70년 훨씬 전에 ‘냉면집 운영하는 아버지’ 곁에서 냉면을 삼시 세끼 먹고 자란 분이다. 겨울 방학이면 형들이 꿩 잡으러 다니는 걸 보신 분이다. 직접 냉면용 꿩을 잡아본 분이다. “반드시 꿩고기 넣은 냉면이 원형 냉면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나 꿩고기 육수가 정답은, 물론, 아니다. 

우리가 '평양냉면'이라 부르는 냉면의 모습. 슴슴한 맛을 자랑하는 이 냉면은 언제나 우리에게 '평양냉면'이었다.

냉면에 관한 판단은 ‘독립적’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냉면이 있다. 

더구나 오래전에 평양에서 평양냉면을 먹어본 사람들, 집안에서 직접 냉면집을 운영해본 경우는 더욱 강한 ‘나만의 판단’을 가지고 있다. 직접 경험한 일은 힘이 강하다. “내가 먹어봤는데 말이야”라고 시작하면 도저히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냉면이 ‘전국적’이었다. 계곡 장유의 냉면은 경기도 안산 언저리, 다산 정약용의 냉면은 황해도 서흥도호부다. 순조의 냉면은 당시 한양에 이미 냉면 테이크아웃 점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재 유득공의 냉면은 평양냉면이다. 신야 이인행은, 냉면이 당시 관서(關西)지방, 평안도 일대에서 널리 퍼졌음을 보여준다. 평양을 포함하여 평안도 전체가 겨울이면 ‘메밀국수+동치미’를 먹었다.


고명과 육수도 마찬가지. 정해진 것 없이 시대별로 여러 가지였다. 계곡의 냉면에 등장하는 자줏빛 육수는 정체를 알 수 없다. 동치미나 고깃국물은 아니었다. 다산과 신야의 냉면은 배추김치 혹은 동치미다. 영재와 순조의 냉면에는 돼지고기가 등장한다. 아직 닭고기, 꿩고기, 쇠고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냉면 육수의 ‘통일’은 없다. 여전히 지역을 특정한 냉면도 없다. 평양냉면이라고 못 박지 않았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하재 지규식도 냉면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하재는 1851년생이다.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일제강점기가 시작하는 무렵의 인물이다. 하재는 궁중에 그릇을 납품하는 일을 했다. 갑오경장으로 신분제도가 무너진다. 궁중 사옹원도 직제가 달라진다. 하재는 이 시기 궁중으로부터 그릇 만드는 분원(盆院)을 불하(拂下)받는다. 그릇을 납품하던 공인(貢人)이 어느 순간 경영자가 된다. 기록에는 하재가 ‘상한(常漢)’이라고 했다. 상것, 신분이 낮았음을 의미한다. “하재일기”는 1891년부터 1911년 사이 하재 지규식의 일기장이다. “하재일기”에는 하재가 업무상 만난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냉면을 먹었음을 보여준다. 길거리 식당에서 ‘냉면을 먹었다’고 하고, 가정집에서도 냉면을 먹었다고 적었다. 당시 냉면 가격도 명시했다. ‘항라(亢羅) 1필이 30냥이고, 냉면 한 그릇이 1냥’이라는 내용이다. 항라는 명주, 모시 등으로 짠 여름 옷감이다.


1895년(을미년) 4월 24일의 일기 중 일부분이다.   

   

나와서 궐문 밖에 이르니 황토가(黃土街)에서 수백 사람이 (중략) 한 지사(韓知事)에게 초청받아 동지 두서너 명과 함께 그의 별실로 가서 냉면을 먹고 함께 이현
(泥峴)에 가서 일인(日人)의 족예(足藝)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황토가는 오늘날 세종로 사거리, 동화면세점 언저리다. 이현은 진고개다. 한 지사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지사는 2~3품 높은 품계의 벼슬아치다. 높은 벼슬아치 집 별실에서 냉면을 대접받는다. 냉면은 일상의 음식이면서 손님맞이에 사용한 고급 음식이었다. 


여전히 ‘평양냉면’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음식이지만 그저 ‘냉면’이라고 표현한다. 일제강점기에도 마찬가지. 냉면은 전국적으로 나타난다. 평양냉면이라는 고유명사는 쉬 나타나지 않는다. 


1923년 2월 24일의 신문 기사 중에 “간도 음식점 조합의 결의”라는 내용이 있다. 2월 5일 간도 지역에 있는 냉면집 조합원들이 이해 5월1일부터 “일본장유(간장) 대신 조선 장유를 사용하겠다”고 결의를 했다는 내용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냉면집 6-7곳의 매년 소비하는 일본 장유 값이 3만 원 선이다. 냉면집 이익 대부분이 일본 장유 값으로 나간다. 


일본, 조선 장유의 차이는? 조미료다. 일본 장유는, 예나 지금이나, 인공 조미료 배합, 활용이 좋았다. 조미료는 편한 재료였다. 조미료 국물은 상하지 않는다. 대단한 맛을 보장했다. 식중독 사고도 피할 수 있었다. 냉면 국물은 동치미나 백김치 혹은 고깃국물이다. 냉장, 냉동 시설이 시원치 않으니 여름철 육수는 쉬 상했다. 일본 조미료 회사는 조미료를 무기로 직접 냉면집을 연 일도 있었다. 


냉면의 조미료 육수는 뿌리가 깊다. 1931년 12월 17일의 광고내용이다. “냉면+아지노모토=美味(미미), 모든 음식+아지노모토=美味, 음식점+아지노모토=千客萬來(천객만래)” 광고주는 “李王家御用達(이왕가어용달) 鈴木商店(영목상점)”.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후, 황실(왕실)을 ‘이왕가’로 격하했다. 이왕가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조달하는 ‘영목상점’이 파는 조미료다. 


어떤 경우라도 ‘평양냉면’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냉면이다. 


동아일보 1938년 7월 9일 자에는 서울의 ‘냉면 식중독 사망 사건’이 실려 있다. 


강원도 평창에 사는 구상봉(31세)은 1938년 7월 5일 서울 영등포 사는 처남 이오동(28세)을 찾아온다. 처남 이오동은 멀리서 찾아온 매부 구상봉에게 영등포 ‘덕흥옥’에서 냉면을 대접한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복통, 토사에 시달린다. 식중독. 이오동은, 동네 ‘소전(小田)병원’에 입원했으나 7월 7일 새벽 3시에 사망, 구상봉은 서울(경성)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으나 7월 7일 오전 10시 무렵에 사망한다. 1938년에도 평양냉면이라는 표현은 널리 쓰이지 않았다. 그저 냉면이다.


비슷한 시기인 1935년 5월, 소설가 이무영의 “영남주간기”. 이무영은 “경남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고 했다. 경성, 평양뿐만 아니라 남쪽의 지방 도시에도 ‘한밤중 냉면 배달’은 흔했다. 의령은 진주권이다. 평양냉면은 아니고 그저 냉면이다. 지역별 냉면으로 치자면, ‘진주냉면’이다.  


신의주에서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냉면을 먹고 집단으로 식중독을 겪는다. 신의주는 중국과 가까운 국경도시다.  


언제부터 ‘평양냉면’이었을까? 평양냉면의 시작은 ‘냉면의 공장 대량 생산’과 연관이 깊다. 냉면을 뽑는 전통적인 기구는 ‘분틀’이다. 유압식 제면기는 1980년대 무렵 보편화 되었다. 그 이전에는 분틀로 생면을 뽑았다. 밀도가 높은 재질의 나무나 구리 합금 등으로 ‘분창(粉窓)’을 만든다. 구멍이 많이 뚫린 분창에 곡물가루 반죽을 얹고 위에서 내리누른다. 이른바, 압착면(壓搾麵)이다. 


서유구의 ”임원십육지“에도 반죽을 위에서 눌러, 가는 구멍으로 뽑아내는 압착면이 있다. 분틀, 분창도 없으면, 바가지 등에 좁은 구멍을 뚫고, 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한 다음, 좁은 구멍으로 국수를 뽑았다. 강원도 올챙이 국수 만드는 방식이다. 


(좌) 기산 김준근의 그림 '국수 누르는 모양'을 옮겨 그린 어느 그림. 냉면은 언제나 '냉면' 일 뿐, 평양냉면은 나중에 고유명사화된다.

분틀, 유압식 제면기는 면자(麪榨)와 닮았다. 통나무의 중간을 둥글게 뚫고 그 구멍의 안을 무쇠로 싼다. 무쇠 바닥에 작은 구멍을 무수히 뚫는다. 국수는 이 작은 구멍으로 나온다. 면자, 분틀, 유압식 제면기는 같은 원리다. 19세기 말 조선의 풍속도를 많이 남긴 기산 김준근의 그림 중에 ‘국수 누르는 모양’이 있다. 사내가 벽에 발을 걸고, 온몸으로 국수를 뽑는다. 국수는 바로 뜨거운 솥으로 들어간다. 분틀 혹은 면자 방식이다. 


국수의 대량 생산은 ‘국수 공장’에서 가능했다. 평양냉면의 시작은 바로 이 ‘국수 공장’이다. 중국과 가까운 대도시다. 평양은 중국 통로 중에서도 핵심 지역이다. 원래 국수와 냉면을 즐겨 먹던 곳. 중국의 국수 문화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지역이다. 


1930년대를 지나면서 평양에는 대규모 ‘국수, 냉면 공장’이 들어섰다. 국수를 즐겨 먹는다. 시쳇말로 ‘내수’가 있는 곳이다. 1930년대 ‘평양의 공장에서 만드는 냉면, 국수’는 일본으로도 수출된다. 경성(서울)에도 평양냉면이 진출한다. 숱한 가게들이 ‘평양’ 이름을 달고 평양냉면을 내놓았다. 평양냉면은 서서히 고유명사화된다. 


해방 후인 1948년 12월 3일, 동아일보의 독자투고다. 제목은 ‘새빨간 거짓말’.    

    

평양냉면, 냉면옥(冷麪屋)에서 흔히 이런 문구가 써여져(쓰여) 있다. 평양냉면이 아무리 맛있은들 38선을 넘어 운반해왔단 말인가요? 서울서 만드는 냉면을 평양냉면이란 새빨간 거짓말.     

 

필자는 익명이다. ‘시내 신당동 1’. 신당동 사는 어느 시민이라는 뜻이다. 평양냉면이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 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익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냉면은 언제나 냉면일 뿐이었다" 편 >>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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