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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Jun 08. 2020

육개장-100년 남짓의 역사, 하지만 소중한 한식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육개장은 우리 시대의 음식이다. 육개장은 한식의 특질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한식은 ‘변형’ ‘발전’이 특질이다. ‘고깃국’의 역사는 길다. 육개장의 역사는 100년 남짓이다. 육개장은 변형, 발전된 고깃국이다. 

출발은 고깃국이다. 고깃국 중 개장국이다. 개장국은 ‘개고기+장국’이다. 장국[醬羹, 장갱]은, 된장 등 장(醬)을 푼 물을 이른다. 된장 푼 물에 개고기를 넣고 끓인 것이 개장국이다. 개장국은 ‘狗醬(구장)’ 혹은 ‘狗醬羹(구장갱)’이다. 구장을 한글로 풀면 개장이다. 된장을 푼 이유는 간단하다. 잡냄새를 없애고, 간을 잡는다. 음식은 장맛이다. 된장 푼 물이 바로 육수다. 육수에 개고기를 넣고 푹 곤 것이 바로 개장국이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육축(六畜)’을 먹도록 했다. 육축은, 집에서 기르는 여섯 가지 동물이다. 가축이다. 소, 말, 개, 돼지, 양, 닭이다. 유교의 출발인 중국의 사정이 드러난다. 한반도 사정은 다르다. 


소는 개체가 크다. 소는 농사를 짓는 주요한 도구다. 오늘날은 소를 식용의 대상으로 여기지만, 오래전에는 소는 농사를 짓는 노동력으로 여겼다. 소 없는 농사는 힘들다. 소는 장정 스무 명의 일을 대신한다. 가난한 시절이니 소도 귀했다. 마을에서 몇 마리를 기르면서 공동으로 사용했다. 더러 넉넉한 집에서는 소를 빌려주기도 했다. 


고려 시대, 불교를 믿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았고, 특히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표현은 틀렸다. 불교의 살생 금지와 고려 시대 고기 금지는 큰 관련이 없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년)은 1123년 고려에 온다. 그가 남긴 기록이 “선화봉사고려도경”이다. 줄여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 부른다. 내용에 대한 다툼은 있지만, 고려의 풍속을 정리한 서적이다. ‘제23권_잡속(雜俗)2_도재(屠宰)’에 고려의 식육 습관을 기록했다.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중략)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  


고려는 불교 국가이기 때문에 짐승의 도살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순이다. 중국 송나라 사신이 오면 미리 양과 돼지를 준비했다가 도축한다고 했다. 불교의 불살생은 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를 믿기 때문에 소를 도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록 송나라 사신이 오더라도 소의 도축은 힘들다. 소는 그 정도로 귀한 존재였다. 대신 양과 돼지를 도축한다고 했다. 양과 돼지 역시 짐승이다. 불교 불살생의 대상이다. 소는 도축하지 않고 양과 돼지는 도축했다? 양과 돼지가 그나마 만만했다는 뜻이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한반도의 여름철 덥거나 겨울철 건조한 날씨는 양을 키우기 좋지 않다. 품종 개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양을 키우기는 지금도 까다롭다.


돼지는 풀을 먹지 않는다. 인간과 같은 것을 먹는다. 일도 하지 않는다. 돼지를 기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돼지 역시 고온 다습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건조하고 추운 한반도의 겨울을 좋지 않다. 돼지를 많이 기르지 않으니 돼지 사육법도 뒤떨어졌다. 조선 초기 세종대왕 시절에도 “중국에서 돼지 사육법을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말기에 설치된 금살도감(禁殺都監)은 유교국가인 조선 시대에도 꾸준히 유지된다. 소의 도축을 금하되, 대신 필수적인 고기는 돼지와 양으로 대체했다. 


돼지를 꾸준히 길렀던 것은 ‘다른 고기’를 구하기 힘들어서였다. 음식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도구다. 궁중에서 돼지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 쓴 이유는 제사와 중국 사신 접대 때문이었다. 궁중의 각종 제사와 외국 사신 접대를 위해 고기는 필수적이다. 소 대신 돼지, 양을 기르고 도축한 이유다. 


말은 승용의 대상이다. 파발마로 멀리 소식을 전하거나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이 이용했다. 말은 식용의 대상이 아니라 통신, 운반의 도구였다. 살아 있는 말의 가격이 말고기값보다 비싸면 도축을 하지 않는다.


닭은 개체가 작다. 행사를 위하여 도축을 하려면, 수십,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필요하다. 작은 가축을 도축하려면 노동력도 많이 필요하다.


만만한 게 개다. 인간이 먹고 남은 찌꺼기나 인분도 먹는다. 집을 지키고, 평소 나들이에도 동반한다. 큰 병 없이 잘 자란다. 던져두면 스스로 자란다. 개장국을 끓인, 개고기가 흔했던 이유다.


개고기는 ‘보신의 대상’이 아니다. 가난한 시절 단백질 공급원이었을 뿐이다. 몸에 좋기 때문에 보양으로 먹었던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먹었던 상식(常食)의 대상이었다. 


조선 말기, 주막을 중심으로 개고기는 널리 퍼진다. 민간의 주막에서 내놓을 것은 개고기, 개장국뿐이었다. 소, 말, 돼지, 양, 닭을 쓸 수 없으니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주막에서는 개고기, 개고기 국을 내놓았다. 


개고기가 사라진 것은 엉뚱하게도 청나라 때문이다. 


우리는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결합체다. 농경과 기마의 특질을 뒤섞었다. 중국 청나라는 다르다. 전형적인 기마, 수렵 민족이다. 농경 국가인 중국을 통치하지만 뿌리는 만주, 기마, 수렵 민족이다. 


‘개의 지위’는 두 민족 사이에 다르다. 기마민족에게 개는, 동반자다. 기마민족은 사냥으로 삶을 잇는다. 사냥에 개는 필수적이다. 개는 식용의 대상이 아니다. 깊은 산속에서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는 동반자다.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준 것도 바로 개다. 만주족의 청나라가 개를 먹지 않았던 이유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통하여 치욕을 겪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머리를 꿇었다.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나라는 도륙이 나고, 숱한 이들이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했다. 쉬 잊어버릴 일은 아니었다. 교류도 한정적이었다.


병자호란 후, 200년쯤의 세월이 흘렀다. 18세기 들면서 청에 대한 적개심은 줄어든다. 청나라는 유럽 등 외국의 문물도 받아들인다. 청나라의 융성기다. 한반도에는 북학, 실학이 발전한다. 적개심 대신 청나라를 보고 배운다는 풍조가 시작된다. 18~19세기에는 청나라 풍습을 따라,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조선 후기에는 개고기 식용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이 뒤섞인다. 


고종 시절 영의정을 지냈던 귤산 이유원(1814~1888년)은 “임하필기”를 남겼다. 이 기록에 개고기 식용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연경(북경)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1756~1838년)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사람들이 매우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황해도)장단의 이종성(1692~1759년)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황해도 장단의 이종성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심상규는 순조, 헌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심상규가 성절사로 연경을 방문한 것은 1812년이다. 19세기 초반이다. 두 사람 모두 높은 벼슬아치였다. 시대적으로는 ‘개고기 식용 반대파’인 이종성이 심상규보다 앞선다. 이종성은 18세기 중반까지 살았다. 앞선 이는 반대파, 뒤 시대 사람은 찬성파다. 조선 후기, 개고기 식용, 반대파는 뒤섞여 있었다. 

육개장은 변형과 발전이라는 한식의 특질을 고스란히 지닌다. 100년 남짓한 육개장의 역사. 육개장은 변형, 발전된 고깃국이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육개장이 시작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쇠고기 식용이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조선 시대 내내 쇠고기의 또 다른 이름은 ‘금육(禁肉)’, 금지하는 고기였다. 조선 말기, 나라의 체제가 흔들리면서 금육도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일제강점기에는 금육의 개념이 사라졌다. 


도축이 편해지면서 쇠고기와 부산물의 생산이 늘어났다. 민간에서도 쇠고기 혹은 부산물을 구하기 쉬워졌다. 


경부철도의 개통으로 대구는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시장이 서고, 사람들이 모인다. 조선 시대 주막에서는 개고기를 끓인 국물, 개장국을 내놓았다. 개고기 반대파가 많아지면서 개장국을 피하는 이들도 늘어난다. 


‘쇠고기로 마치 개장국 같이 끓인 음식=육(肉)+개장국’=육개장이다. 


음식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도구다. 그중 핵심은 고기다. 유교 문화가 발달하고, 여전히 조상 제사를 모시며, 향교의 공자 사당을 운영하던 경북 지방에서, 고기 문화가 발달한 것은 당연하다. 


고사리, 대파, 토란대, 콩나물, 숙주나물을 넣고, 힘줄이 있는 소의 우둔 부분(양깃살, 양지 살)과 더불어 푹 곤다. 나물을 볶을 때, 소 두태(豆太) 기름(콩팥 부위의 기름)과 고춧가루로 낸 붉은 기름을 더한다.


인간은 평생, 네 번의 큰 행사를 치른다. 관혼상제(冠婚喪祭)다. 어른이 되고, 혼사를 치른다. 초상을 치르고, 제사를 받든다. 성인식, 혼사, 제사는 날짜가 미리 정해진다. 경북 안동의 국수 제사는, 국수가 귀한 음식, 큰 행사가 있을 때 반드시 사용해야 할 음식임을 보여준다. 국수는 결혼식에서도 사용한다. 


문제는 초상이다. 갑자기 닥친다. 설혹 집안 어른의 돌아가실 날을 안다 해도 미리 음식을 장만할 수는 없다. 갑자기 일을 당하고, 손님들이 밀어닥친다. 쉽게, 빨리, 많이 장만할 음식이 필요하다. 육개장은 요긴하다. 초상집에서 육개장을 내놓는 이유다. 


육개장의 붉은 기름을 두고, “붉은색은 벽사(辟邪)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틀렸다. 돌아가신 이를 모셔서 식사를 대접하고, 그리워하며, 먼 길 보내드리는 것이 초상이다. 육개장은 손님을 위한 음식이다. 조상을 모셔야 할 판에 귀신을 쫓을 수는 없다. 제사상에는 육개장을 차리지 않는다. 


육개장. 불과 100년 남짓의 역사를 지닌 음식이지만, 소중한 한식이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 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익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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