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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May 24. 2020

이탈리아 사람들이 알려준 한식의 새로운 길

권은중 <음식경제사> 저자 / 음식 칼럼니스트 

"한국이 뭐야?(Che cos’e corea?)"


한국에서 내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20여년전 유학시절에 시칠리아에 여행을 갔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 이탈리아에는 한국이 어디인지를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아예 ‘코레아(Corea)’라는 단어조차 생소해 “한국이 어디야”가 아니라 “한국이 뭐야”라는 질문을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20년쯤 뒤인 지난해 내가 이탈리아를 갔을 때는 완전히 달랐다. 한국을 방문해본 사람은 드물었어도 한국을 모르는 이탈리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내가 방문했던 이탈리아 지역 가운데 가장 외진 곳이였던 시칠리아의 마르살라에서 만난 70대 할머니도 한국을 알 정도였다. 


특히 이탈리아 젊은 여성들의 관심이 폭발적이었다. K팝과 넷플릭스에서 방영됐던 <킹덤>이라는 드라마 덕분이었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 나는 20대 이탈리아 여성에게 이탈리아 회화를 배웠다. 그녀는 ‘엑소’를 좋아했고 BTS 등 한국의 많은 아이돌을 알고 있었다. 약간이지만 한국어를 쓰고 말할 줄도 알았다. 또 내가 한달간 머물었던 볼로냐의 에어비앤비 주인집 딸은 고1인데 처음 만나는 날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이유를 물어보니 “BTS노래를 좀더 알고 싶다”는 거였다. 그 학생에게 BTS는 위로와 안식을 주는 우상이었다. 


이 정도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으니까 나에게 한식을 요리해 달라고 부탁하는 현지인도 제법 있었다. 내가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러 온 사람인만큼 한식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아스티에 있는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로 요리 유학을 다녀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음식에 대해 관심이 매우 많다. 빵과 와인으로 대표되는 서양음식의 역사가 고대 로마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또 지역을 중시하는 지방분권 문화도 이유다. 이탈리아인들은 476년 로마제국이 사라진 뒤 19세기말까지 오랫동안 도시국가로 나누어져서 살았다. 거기다 같은 주라도 도시마다 파스타가 다르고 와인이 다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역별로 음식 문화가 발달해 있다. 이런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한식을 해주는 건 신나는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긴장되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이탈리아인에게 대접했던 음식은 여러 종류였다. 불고기, 잡채, 미역국, 김치 같은 정통 한식도 있었는가 하면 김밥, 라면, 떡볶이 같은 분식도 있었다. 그리고 삼겹살에 상추쌈같은 코리안 바비큐도 해주었다. 


이탈리아인들이 좋아하는 한식은 이미 알려진 것과 비슷하다. 내가 만든 요리 가운데 그들이 가장 좋아했던 요리는 불고기였다. 간장에 달짝지근하게 양념해 굽는 불고기에 대부분 좋은 반응을 보였다. 불고기는 비빔밥과 함께 이미 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한국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치에 대해서도 호감도가 높았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별로 매워하지 않았다. 맛에 대해서도 호평이었다. 김치가 발효음식이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 음식이라는 것도 대부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불고기와 김치에 대한 호평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외의 음식들이 이탈리아 지인들의 호평을 받았는데 이들의 독특한 한식 취향은 나에게 여러 가지 화두를 던졌다.  


대표적인 음식이 쌈장이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한국 학생들은 2~3주에 한번쯤 바비큐 파티를 했다. 그 때 학교 관계자와 외국인 학생들에게 삼겹살을 구워서 채소와 쌈장을 내놓았다. 물론 귀찮아서 아예 쌈을 안 먹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단 맛을 보면 대부분 놀랐다. 고기와 채소 때문이기도 했지만 쌈장의 역할이 컸다. 시판용 쌈장인데도 그들은 그 독특한 맛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쌈장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치즈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탈리아에는 많은 치즈가 있다. 모짜렐라처럼 신선한 치즈도 있지만 오래 발효된 치즈가 더 많다. 그래서 쌈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인들이 가장 자주 먹는 파르미자노 레지아노나 그라노 파다노는 최소 10개월을 숙성 한다. 우리 오래 묵은 된장을 높게 쳐주듯이 이들도 오래된 치즈를 좋아한다. 만약 묵은 집된장과 고추장으로 만든 쌈장이었다면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하는 궁금증이 들 정도였다.   


발효식품에 대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애정은 나이나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김치뿐 아니라 좀더 강한 한국의 발효식품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나의 이탈리아어 선생님은 한국의 젊은 여성들도 꺼릴 수 있는 오징어젓갈을 좋아했다. 지난해 가을 토리노한글학교의 한국인 선생님 한 분이 나와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해 불고기와 전 등 한식을 차려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매운 걸 잘 못 먹는데도 오징어젓갈을 뜨거운 밥에 올려 맛있게 먹었다. 젓갈을 먹으며 그는 “나는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나 봐”라고도 말하기도 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 젓갈을 먹기란 쉽지 않다. <100만 파운드의 메뉴>라는 영국의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이 있다. 푸드 트럭이나 노점상 가운데 성공할 만한 곳을 골라 정식 레스토랑을 차릴 수 있게 최대 100만 파운드(우리돈 15억원)를 지원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도 김치가 가끔 등장한다. 하지만 주인공 셰프들은 한식이 스파이시하고 건강하다고 전제하면서도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만을 샐러드 양념으로 쓴다.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식의 심화 단계인 젓갈을 먹는다. 젓갈이 들어간 김치도 좋아한다. 이는 이탈리아인들이 멸치를 올리비유에 절인 엔초비를 즐기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측해 본다. 또 우리나라 청양고추처럼 매운 페페론치노를 즐겨 먹는 것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한식과 잘 맞는 이유일 것이다(우리가 이탈리아 음식에 거부감이 없는 것도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두 번째로 평점이 높았던 것은 김밥이었다. 

한국어를 가르쳐달라 했던 이탈리아 여고생에게 나는 한국어 레슨 대신 한식을 한번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학생과 가족을 초대해서 불고기, 잡채, 김밥 등을 해주었다. 그런데 김밥에 대해서는 반응이 아주 좋았다. 맛도 좋고 당근과 오이같은 채소를 많이 넣어서 만들어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조미 김도 아주 좋아했다. 밥없이 과자처럼 먹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서. 한국인 동기들과 한달에 1~2번 기숙사에서 한국 관계자와 다른 나라 학생들을 초대해 한식을 해주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김밥을 일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에서 초밥은 매우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초밥은 일본 음식이지만 이탈리아 초밥집은 거의 중국인들이 운영한다. 북부 토리노에서부터 남부 시칠리아까지 12~15유로면 무제한으로 초밥을 주는 가게는 정말 많다. 주로 젊은이들이 많이 간다. 


이탈리아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동양인은 중국인이다. 초밥집 가운데 아예 일본식이 아니라 중국식으로 레스토랑을 꾸미고 레스토랑 상호도 중국을 상징하는 용이 들어가는 집들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인들이 중식과 일식 그리고 한식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한·중·일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저 모두 동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밥과 김밥은 다르다’라고 어떻게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식에 우리나라만의 확실한 스토리가 필요해 보이는 까닭이다. 


<100만 파운드의 메뉴>에서 나오는 한식 메뉴의 소스는 일본 된장이나 인도 카레로 만든다. 비빔밥도 그냥 밥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인도의 사모사처럼 튀겨서 이런 소스를 얹어 내놓는다. 서양인에게는 밥튀김이 맨밥보다 훨씬 친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음식은 어디까지가 한식일까? 어떤 음식과 조리법과 섞여있어도 ‘이건 한식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한식의 원형질은 무엇일까?   




화두도 이탈리아에서 떠올랐듯이 그 실마리도 이탈리아에서 찾았다. 이탈리아에서 발달한 것 가운데 하나가 커피다. 그런데 이탈리아에는 한국 식재료를 이용한 독특한 커피가 있다. 인삼커피다. 인삼 엑기스를 커피에 함께 섞어서 내어주는 거다. 아주 인기 있는 커피는 아니지만 몸에 좋은 퓨전스타일의 커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인삼이 한국에서 왔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진생이라는 일본어로 표현될 뿐이다. 아쉬운 대목이다. 


인삼처럼 한국을 잘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인삼은 화강암 지형이 많은 한반도 고유의 식물이다. 중국도 일본에서도 자라지 않는다. 원래는 천연 삼 즉 산삼으로만 존재하다가 조선시대 고려 왕족들이 탄압을 피해 산에 숨어들어가 인공재배하면서부터 지금의 인삼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비련의 왕족이 만들었다는 탄탄한 스토리가 있다. 그러나 구글이나 유튜브를 검색해보면 인삼 요리는 삼계탕으로 대표되는 치킨스프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인삼의 맛도 스토리도 놓치고 있다.  


인삼을 이용하면 이미 유명 셰프들이 쓰고 있는 흑마늘처럼 독특한 소스를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삼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쓴 맛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 같았다. 2008년 한국에 문을 연 미슐랭 2스타의 프렌치 레스토랑 피에르 가니에르의 총괄 셰프인 프레데릭 에리에(Frédéric Eyrier)가 지난해 6월 미슐랭가이드와 했던 인터뷰를 보면, 이 레스토랑에서는 인삼 진액을 디저트인 수플레(soufflé)를 만드는데 쓴다. 에리에 셰프는 한국산 오미자와 흑마늘의 우수성도 칭찬했는데 푸아그라와 고기요리는 물론이고 음료와 디저트에도 쓴다고 말했다. 마늘과 오미자 역시 우리만의 탄탄한 스토리를 입힐 수 있는 한식 재료다(오미자는 원래 근대 이전까지 여름철 냉면을 만들던 국물로 쓰였다).  

 

이탈리아에서의 짧은 경험이지만 나는 한국인과 기질이나 입맛이 비슷한 이탈리안인들이 쌈장같은 장류와 김치와 젓갈같은 오묘한 발효음식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차별화된 한식의 스토리를 들려줘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비빔밥, 삼계탕, 불고기 같은 단품 중심으로 한식을 알리는데 집중했다. 한반도가 빚어온 발효식품과 인삼 같은 독특한 스토리를 가진 음식을 단역 배우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고대 로마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런 자랑스러운 음식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새로운 한식이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는 사회부, 경제부 기자로 활동하다 30대 후반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음식 공부를 했고 현재 음식 칼럼니스트로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독학 파스타>, <10대와 통하는 요리 인류사>, <음식 경제사>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익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매월 말에는 다양한 한식 관련 전문가들의 자유로운 글이 업데이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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